재미있는 보드게임
아빠: 이제 그만하고 잘까?
아들: 아빠 우리 이거 한번 또 해보자, 이거 정말 재밌다.
아빠: 정말 재밌어? 그럼 딱 한 판만 더하고 자자?
아들: 응. 딱 두 판만 더하고 자자
아빠: 응? 딱 한판~ 아빠 너무 졸린데
아들: 그래 좋아. 딱 한판만 더하자. 이거 정말 재밌어.
아들은 보드게임을 좋아한다. 처음에는 즐겁게 놀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고 즐겁게 놀다 보니 욕심이 생겨 기왕이면 보드게임의 규칙을 익히며 약속과 규칙 합의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인지적 발달과 사회성 습득 같은 것들이 이루어지기를 은근히 바랬다.
놀이는 그 자체로 즐거운 것이라 어떤 목적을 띄게 되는 순간 더 이상 놀이가 아닌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규칙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정해진 룰과 전혀 다른 엉뚱한 방식으로 게임이 진행되더라도 그저 흘러가는 대로 함께 놀았다. 그런데 보드게임으로 아이와 함께 놀다 보니 처음 생각했던 인지적 차원의 발달보다는 예상치 못했던 정서적 차원의 발달이 진행되는 것이 보였다.
게임의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필요한 조건은 아마 승패가 결정된다는 것이리라. 게임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승자와 패자가 나뉜다. 승리를 위해, 패배하지 않기 위해 게임에 집중하는 과정에서 아이는 여러 가지 정서적 경험을 한다.
게임이 끝날 때까지 이기고 싶은 마음을 바탕으로 조마조마한 긴장감을, 상대방이 잘하는지 못하는지 지켜봐야 하므로 상대를 관찰할 수밖에 없기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집중력, 상대방이 실수를 했을 때에는 내가 게임에 유리해졌다는 환희와 안도감을, 반대로 내가 실수를 했을 때에는 좌절과 안타까움을, 그렇게 짧거나 혹은 긴 시간의 경기 이후에 결국 승리를 거머쥐었을 때 느낄 수 있는 기쁨의 쾌감을, 반대로 패배를 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슬픔과 비애의 마음을.
아이가 느끼는 감정의 진폭은 어른들이 느끼는 그것과 다르다. 모든 것이 생경한 어린아이들에게 다양한 감정의 경험은 감당하기 힘든 파도처럼 자신을 압도하는 거대한 압력 일지 모른다. 그래서 기쁠 때에는 일어나서 박수를 치며 춤을 추고 슬플 때에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통곡을 한다. 어른의 눈으로 바라봤을 때에는 별 것 아닌 일들이 아이들에게는 일생일대의 거대한 일로 다가서는 것이다.
보드게임은 여러 감정을 짧은 시간에 느끼기 좋은 교구다. 게임의 전 과정에서 아이들은 웃다가 울고, 짜증을 내다가 기뻐하고, 조급해하다가 여유로워진다. 여러 형태의 감정을 경험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것은 이해의 폭을 넓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니 단순히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한 과정이라고 하기엔 무언가 부족하다. 감정을 경험한다는 것은 모든 발달의 시작점인 동시에 종착역인 까닭이다.
우리는 경험한 만큼 이해할 수 있고 느껴본 만큼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시절 폭풍 같은 감성의 경험은 중요하다. 삶의 저변을 넓히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감정적 경험은 어린 시절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결국 감정적인 것, 감성적인 것에 이끌리게 된다. 고향을 그리워하고,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에 끌리고, 음악을 듣고 미술작품을 감상하고, 영화를 보고 여행을 가는 이런 모든 행위는 결국 내 감정을 매만지는 일이다. 나를 알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언제 기쁘고 슬픈지, 결국 내 감정과 마음을 살피는 일이다. 모든 앎을 위한 행위의 끝은 결국 마음과 맞닿아 있다.
이거 정말 재미있다
대견했다. 스스로 기뻐할 줄 아는 모습이. 딱 한 번만 더하자고 조르는 모습에 피곤하여 눈이 감기면서도 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쁨을 찾는 모습이 실망과 서운함으로 바뀌도록 놔둘 자신이 없어서였다. 빛나는 눈빛은 좌절을 겪을수록 점점 탁해져 간다. 나이를 먹을수록 눈빛이 탁해져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고들 이야기하지만 그 이유가 나 때문이라면 그 얼마나 슬픈 일인가.
무언가에 대한 흥미는 영원할 수 없을 테지만, 잠시라도 함께 눈빛을 빛내며 시간을 보낼 수 있음에 감사한다. 오 년 뒤에도 십 년 뒤에도, 아니 평생토록 "아빠 이거 정말 재밌다. 한번 더 하자"라는 말을 듣고 싶다고 한다면 욕심일까. 아이의 미소를 바라보며 행복한 욕심을 부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