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집에 몰려오는 것 같애

시원한 저녁 바람을 맞으며

by 정 호
아들 : 시원하다~

아빠 : 그치 오늘 저녁 바람이 정말 시원하다.

아들 : 꼭 가을이 집에 몰려오는 것 같애


흐르는 시간 속에 완만하게 바뀌어가는 것들이 있고, 어제까지 내 곁에 있던 사람이 오늘부터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는 존재로 바뀌는 것처럼 하루 저녁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들도 있다. 계절의 변화는 후자에 가깝다. 어느 날 갑자기 코를 지나 폐 깊숙한 곳에서 어제와 달라진 공기가 느껴질 때 계절이 바뀌었음을 체감한다.


그런 날이었다. 어제저녁과는 사뭇 달라진 공기가 숨을 쉴 때마다 내 가슴 깊은 곳을 쓸어내리는 것이 느껴지는 날. 후텁지근한 열기를 머금어 축축하고 무거운 대기에서 습기와 열기가 빠져나간 이후의 대기는, 놀이공원 한켠의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던 빵빵한 풍선이 터져버린 후 차분히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내 목덜미와 팔의 피부 위로 그 가벼워진 공기의 무게를 전하고 있었다.


변화를 느낀다는 것은 그 종류에 따라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한 일일 테지만 이런 경우에는 주로 행복함을 느낀다. 여름과 겨울은 자극적인 계절이어서 좋기도 하지만 자극적인 것은 그것이 자극적인지라 오래 유지하기가 힘에 부친다. 그래서 여름 이후에 슬며시 다가오는 가을이나 겨울이 지나고 포근하게 나타나는 봄은 차분한 반가움을 가져다준다.


아이는 어떤 마음을 품고 그런 말을 했을까. 계절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것들 사이에 순서가 있고 변화를 나타내는 징후를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놀란다. 시원한 바람을 함께 맞으며 가을이 왔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을 때 아이의 입에서 가을이 집에 몰려온다는 말을 듣고 있자니 그와 내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진다.


참 귀한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네가 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리듯이 나는 너의 변화를 매일 알아차리고 있으니, 무감각한 하루와 하루 사이에서 매일 새로움을 안겨주는 너는 고마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자신과 타인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참 많은 것을 자꾸 바라기만 해서 때로는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너무나 커다란 감정과 마주할 때 우리는 차마 그 감정을 표현하는 말을 내뱉지 못하게 된다. 눈물이 터질 것 같은 충만한 사랑을 표현하고 싶을 때 차마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삼키는 일이나,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을 겪을 때 차마 괴롭고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고 가슴이나 벽을 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런 표현들로 내 마음을 표현하기에 턱없는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일은 그런 종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리라. 너무나 사랑스러운 마음에 매일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하여 꼬옥 껴안고 입술을 부벼도 본다. 어떻게 해서든 나의 이 마음을 오롯이 전하고 싶은 간절함에 입의 언어, 몸의 언어를 총동원해보지만 그럼에도 나의 마음을 온전히 표현해내기는 어렵다.


영혼을 가진 두 존재 사이에 영원한 사랑은 없다고들 이야기하지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영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비록 일방적인 사랑이라고 할지라도 응답이 없는 사랑이라고 할지라도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커다란 축복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 너와 나누는 모든 대화가 어쩌면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황홀한 순간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