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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지금은 당연한 것들의 흑역사

덕후가 세상을 바꾼다

by 정 호
자동차가 도로에 나와 자전거, 행인, 말이 끄는 수레, 4인용 마차, 가축 떼 등과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할 무렵. 개릿은 큰길 교차로에서 심각한 교통사고를 목격한 일이 있었다. 개릿은 즉각 모두의 통행을 자유롭게 할 해법을 찾기 시작했고, 1913년에는 신호 장치를 실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22년에는 최초의 교통 신호 시스템을 만들어 특허를 받았다. -71p

1941년 스위스 농학자 조르주 드 메스트랄은 알프스 산맥에서 개와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에 저기 바지와 개의 몸에 우엉 속 식물의 씨앗 수백 개가 달라붙은 것을 보고 짜증이 났다. - 중략 - 메스트랄은 이 자연의 신비를 응용하면 두 가지 물질을 일시적으로 단단하게 부착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로부터 10년 동안 메스트랄은 여가 시간에 열심히 연구했지만 그의 아이디어에 흥미를 갖는 사람은 없었다. -99p


우리는 왜 때때로 무언가 하나에 꽂히게 되는가. 게다가 아주 오랜 시간 그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보며 인간을 움직이게 만드는 동력은 무엇일까. 단순히 그 대상이 좋아서 라거나 몰입 자체가 즐겁기 때문이라고 말하기에 10년 20년의 시간은 마치 억겁의 세월과도 같이 느껴진다. 결과가 나오고 나서 지나고 보니 10년이었던 것이지 그 발견과 발명에 쏟아부어야 할 시간이 30년이 걸릴지 50년이 걸릴지 혹은 죽을 때까지 이뤄내지 못할지 당시에는 결코 알 길이 없다. 그만큼 무언가 하나에 꽂혀 꾸준히 몰두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결과물을 만들어내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체 무엇이 인간을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집중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인가.


그것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천재의 사명감이었을 수도, 그저 작은 개인적 호기심에서 비롯된 궁금증의 해소를 위한 유희였을 수도 있겠다. 또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을 꼭 해내야만 하는 어떤 신의 계시처럼 여겼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 수많은 혁신가들의 때로는 목숨을 걸 정도의 모험심과 집요함 덕분에 세상엔 새로운 창조물들이 끊임없이 태어났고 그로 인해 인간의 삶이 점점 비옥해졌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책을 읽다 보니 그들은 왜 그렇게 집요하게, 때로는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몰두했을까 하는 궁금증과 동시에 어느 시절이나 혁신을 가로막는 것들은 늘 존재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새로운 시도는 언제나 모험이 될 수밖에 없겠구나.


혁신과 도전을 가로막는 장벽은 언제쯤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에 관한, 다시 말해 세월에 대한 불안만 있는 것은 아니었을 테다. 목숨을 걸만큼의 위험이 나를 쪼아보고 있다는 실존적인 두려움(낙하산 설계자들의 죽음. 1837년 영국의 아마추어 과학자였던 로버트 코킹은 열기구를 타고 고도 1500미터 상공으로 올라가 낙하산을 펼쳤지만 사망했고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프랑스인 재단사 프린츠 라이첼트 역시 에펠탑에서 자신이 만든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린 뒤 사망했다. 이러한 시도는 1912년까지 무수히 반복되며 수많은 혁신가들의 목숨을 앗아갔다.)이 가장 큰 두려움이었을 테지만 그 외에도 가 틀렸다는 사람들의 두려운 시선 또한 혁신을 머뭇거리게 만드는데 큰 공을 세웠으리라. 에디슨의 일화는 너무 유명하니 생략하도록 하자. 에디슨 말고도 현재에 와서 시대의 석학 혹은 위인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사람들조차 당대에는 비난을 받았던 일이 무수히도 많다.


정신분석학의 아버지 프로이트는 그의 이론을 철저하게 조롱받았으며 처칠과 링컨은 평생 재능 없고 뒤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은 만년 낙제생이었다.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는 시정잡배로 여겨져 사형 선고까지 받았으며 월트 디즈니는 그림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신문사와 은행에서 해고되고 만화가로 취직한 회사 역시 얼마 못가 망했다. 그의 불세출의 걸작 미키마우스, 아기돼지 삼 형제, 피노키오는 조롱과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 바빴다.


불안한 사람들의 무지성적 거부와 음모론은 또 어떠한가. 산업혁명 이후 증기기관을 활용하여 기관차를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고 자연스레 철도에 대한 아이디어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언제나 그랬듯 새로운 아이디어는 수많은 비판에 부딪혔는데 너무 속도가 빨라 승객이 질식사할 수 있다거나 기차 여행을 통해 너무 빠르게 다른 기후로의 변화를 겪게 되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 그 비판의 근거였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런 비판을 입에 담은 사람들이 과학자나 의사 같은 엘리트 집단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례는 고학력자건 소셜 리더건 혁신 앞에서는 모두 그저 필부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바코드 설치 사례 또한 몹시 흥미롭다. 바코드가 개발되고 상용화되기까지 16년의 세월이 걸렸다.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고 신기술에 대한 사람들의 거부감을 지워내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을 테지만 예상치 못한 반대의 목소리가 더욱 시선을 끈다. 바코드 스캔 기술이 국가의 감시 수단이라거나 바코드가 악마의 숫자인 666을 몰래 사용한다는 등의 음모론이 바로 그것인데 이는 대량으로 사람들에게 무언가가 전파되는 어떤 상황에서 늘 등장하는 반대파의 논리다. CCTV나 스마트 뱅킹의 도입 시점, 코로나 예방접종을 시작할 때에도 같은 논리가 등장했는데 MRI나 CT를 찍을 때 사용하는 조영제에도 감시와 통제를 위한 물질이 첨가되어 있다고 말할 정도니 푸코의 판옵티콘 개념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불안을 이식시켜 놓았는지 씁쓸할 따름이다.


세상의 시선이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협잡과는 무관하게 세상은 꾸준히 새로움을 탄생시켰고 그런 새로움은 늘 몇몇의 개척자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그런 무언가에 골똘히 빠져들어 결과물을 내어놓는 개척자들, 다시 말해 덕후들의 몫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덕후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바꾸고 혁신을 일으켜야 한다는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다. 내 삶의 덕후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자신의 삶을 위해 골몰하지 않은 사람이 어찌 무엇을 성취할 수 있으며 어떤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덕후의 자세는 그래서 유용하다. 지치지 않을 용기를 퍼올리게 만들고 만족과 기쁨을 누려 환희의 경험을 하게 하며 운이 좋다면 세상을 이롭게 하는데 아주 작게나마 일조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에 흑역사가 있었듯, 우리의 삶 또한 지금은 비록 흑역사처럼 여겨진다고 할지라도 언젠가 레전드로 탈바꿈되어 회자되는 날이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단, 내 삶의 덕후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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