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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시키는 대로 제멋대로

시작과 처음에 대한 격려

by 정 호
안녕하세요, 시 쓰는 이소호입니다. 나를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 봤을 법한 인사다. 이 산문은 내가 '시 쓰는 이소호'라는 인사를 건네기까지의 삶을 담았다. 사실 담았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무수히 버렸다. 이 이름을 가지기 위해, 웃기지만 그 인사를 건네기까지 무엇을 버렸는지를 썼다. 나는 교우 관계를, 과거를, 기억을 버렸다. -중략-

그래서 '시 쓰는 이소호'가 되기 위해 마지막으로 부모님이 정해 주신 '이경진'이라는 이름까지도 버렸다. - 프롤로그 중 -


거칠고 투박해 보이는 책의 표지 디자인과 "시키는 대로 제멋대로"라는 제목은 작가의 마이너 한 삶의 풍모를 잔잔히 드러내는 것만 같다.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주로 메이저 한 삶을 소비하지만 사실 우리 대부분은 마이너 한 삶을 살아간다. 주류, 대세라는 것이 일반적이고, 마이너 혹은 소수자라는 것이 비일반적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는 것 같지만 어쩌면 그 반대가 보다 정확한 현실에 가깝다는 생각을 한다. 주류의 삶보다 비주류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더 많기에, 어쩌면 대세나 주류가 소수이고 비주류 마이너가 다수에 가깝다. 그래서 정돈되고 말끔해 보이는 것보다 종종 거칠고 투박해 보이는 것들에 더 관심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더 진짜 같은, 나와 가까운 것 같은 느낌이 들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그래서 독립출판 혹은 소규모 1인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인가 하고 가만히 살펴보다가 출판사가 창비여서 잠깐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시키는 대로'라는 글자에 굵은 줄이 죽죽 그어져 있는 표지 디자인이었다. 시키는 대로 살다 지쳐 제멋대로 살기 시작했다는 저자는 제멋대로 살기 위해 많은 것들을 버렸다. 심지어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마저 바꿨다고 하는데, 개명하기 전 이경진으로서의 삶이 시키는 대로 살아왔던 삶의 상징과 같았다고 한다면 이소호로의 개명은 어쩌면 제멋대로의 삶을 살아가고자 작가 스스로 짊어진 어떤 각성의 표식과도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제목과 표지와 프롤로그만을 보고 작가의 삶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궁금해진다는 것은 애정을 품게 되었다는 말과 같다. 책의 첫 페이지를 읽었을 뿐이지만 작가에게 마음을 내어주고 만다.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책을 읽지 않고서는 배겨낼 재간이 없다. 그렇게 작가에 대한 호기심은 책을 집어 들게 만들고 계산대 앞으로 나의 두 발을 옮기게 한다.


좋은 교사가 되고 싶다던 아버지의 꿈으로 인해 대도시인 부산에서 산골마을 무주로 이사를 가는 것으로 경진이의 삶의 기록은 시작한다. 무덤 앞의 폐가를 고쳐 살아야 했고 집 앞을 지나는 버스가 하루 세 번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펑펑 울었다는 작가는 그곳에서 자신의 앞날에 펼쳐질 불안과 절망을 예감했다.


어린 시절 여자 친구들 무리에서 있었던 사건들, 시골살이를 하며 피할 수 없었던 고된 노동의 시간들, 쌍둥이 동생과 함께 주고받으며 품고 길러낸 애증의 감정들,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키 작은 무용수였던 어머니의 삶, 가장 가까웠던 친구와 너무도 쉽사리 적이 되어버린 일, 자기와 같은 이름인 남자 친구와 연애를 했던 일, 자신의 생활기록부, 우울증 심리상담을 받을 때 작성했던 질문지, 자신에 대한 무수한 정의들, 상하이와 아르헨티나, 서울과 아마존 알래스카와 관련된 에피소드들, 직장생활과 sns 상의 스토킹 경험, 처음으로 시를 쓴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던 순간. 차분히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부은 작가는 시인이며 에세이 작가가 된다.


에세이가 좋은 이유는 한 사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담담하게 기록해둔 기록물은 책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흥미진진한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형태만큼이나 그 다큐멘터리의 장르 또한 다양해서 읽는 재미가 있다. 그중 특히 몇몇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다.


안전거리 확보라는 제목의 에피소드는 저자가 스토킹을 당했던 경험과 당시 느꼈던 감정을 서술한다. 독자라는 탈을 쓴 이상한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당했다고 표현했는데 그 내용을 가만히 읽다 보니 유명인들, 연예인들, 세상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사람들이 겪게 되는 불안이 전해져 흠칫하게 된다. 책을 읽고 낭독회나 특강에 찾아와 책과 달리 왜 이렇게 밝냐는 무례한 질문을 받는다던가 sns에 자신이 올린 사진을 무단으로 퍼간 뒤 집 나간 부인이라며 찾아달라고 본인의 sns 계정에 글을 올리거나 내 휴대폰과 숫자가 하나만 다른 번호로 전화를 개통해서 사용한다거나 하는 일들, 그런데 작가를 더욱 무섭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일들이 분명히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법에 의하면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어떠한 처벌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스토킹을 당했던 한 여자를 알고 있다. 수영 강습을 받던 40이 넘은 남자는 20대의 여자에게 자기 혼자 호감을 품는다. 오가며 눈인사를 한 것이 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망상은 끝없이 펼쳐져 홀로 결혼을 꿈꾸고 있다. 그런 착각 속에 남자는 여자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문자와 전화로 온갖 협박과 애정 공세를 퍼붓는다. 집 앞까지 찾아와 귀갓길에 갑작스레 나타난 남자를 보고 여자는 두려움에 떨며 경찰서에 신고를 하지만 구속력 하나 없는 허울뿐인 접근금지명령 이외의 어떤 처벌도 받지 않는다. 이유는 똑같다. 실제로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았기 때문. 예방이라는 개념이 아무래도 우리나라 법에는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다.


낭독회에는 작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유리창 너머의 방, 그리고 일반 독자들이 앉아 있는 커다란 메인 홀이 있었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 유리창 너머 비좁은 공간에 끼지 못한다는 것이 슬펐다. -중략-

나는 그냥 등단한 시인이 너무 되고 싶었기에 굉장히 체계적으로 투고 시스템을 짰다. -중략-

투고 일 년 차에 나처럼 모든 일을 그만두고 시를 쓰는 동료들을 많이 만났다. 투고 이 년 차가 되었을 때 대학원에 갔다. 투고 삼 년 차가 되었다. 이제 대학원이 고작 두 학기 남았다. 대봉투를 몇 개나 사서 부쳤는지 더는 셀 수 없다. 우체국에서 느끼는 열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투고 사 년 차가 되었다. 11월 27일이 생일이었던 내 친구가 전화로 이렇게 말을 했다. "경진아 이상하지. 꿈을 꾸는 것은 저주에 걸리는 것만 같아. 그래도 나는 그 저주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너만 행복하다면" 물론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개월 뒤 기적처럼 나는 등단한 시인이 되었다. -283p


꿈을 꾸는 일은 멈추지 않고 죽을 때까지 춤을 춰야 하는 빨간 구두의 저주와 같다. 끊임없이 움직여 결국 발목이 손상된 뒤에서야 멈추게 되는 빨간 구두의 저주처럼 아무리 퍼마셔도 해갈되지 않는 갈증, 혹은 어떤 욕망으로 인간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기 때문이다. 꿈을 꿔야지만 꿈을 이뤄낼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테지만 꿈이라는 아름다운 덫에 걸려 허우적대느라 돌고 돌다 결국 발목이 부러지고 나서야 눈물을 흘리는 일 또한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는 꿈이 내린 저주의 한 장면이다.


꿈만 꾸는 삶은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우여곡절 끝에 등단 시인이라는 결과물을 거머쥔 작가는 자신의 갈증을 해갈할 수 있었을 테다. 깨달음도, 새로운 시선도 본인만의 허들을 뛰어넘은 뒤에서야 찾아오는 마음의 안식이다. 오 년이 지나고 십 년이 지나도 등단 시인이 되지 못했다면, 작가는 아마 "너만 행복하면 저주도 나쁘지 않다"는 친구의 말에 여전히 행복하지 않다는 답변밖에 내어놓을 수 없었을 테다.


처음은 그러하다.
가장 엉성하며, 의뭉스럽고, 불분명하다.
처음은 늘 그런 것이다.
생각해 보니 처음은 멋질 필요가 없다.
그냥 다음 세계로 넘어갈 힘만 가지면 된다.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최고의 위로가 아닐까. 처음과 완벽은 애초에 어울리지 않는 서술 구조다. 얼기설기해서 엉성하고, 명확하지 않아 의뭉스럽고, 정돈되지 않아 불분명하다. 모든 처음은 진정으로 늘 그래 왔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완벽해 보이는 처음을 구현하기 위해 애를 쓰며 고민하고 세월을 흘려보낸다. 작가의 말처럼 처음은 멋질 필요도, 멋질 수도 없다. 그냥 다음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디딤돌의 역할이면 충분하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처음은 늘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데려다주었다. 그것은 꽤 많은 순간 기쁨으로 자리매김하곤 한다. 새로운 세상은 언제나 흥미로운 것들 투성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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