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혼자 먹으면 맛이 없어, 같이 먹어야 맛있는 거야

부모가 가져야 할 명확한 책임감

by 정 호
아들: 나도 젤리 먹고 싶어

아빠: (조카에게) OO아 젤리 오빠 하나 나눠줄까?

조카: 아니야.

아빠: 오빠도 젤리가 먹고 싶대 같이 나눠 먹으면 어때?

조카: 싫어

아들: 혼자 먹으면 맛이 없어~ 같이 먹어야 맛있는 거야


세 살 조카와 네 살 아들은 전쟁과 평화 사이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가로지른다. 불협화음은 주로 간식이나 유튜브 채널 독점, 어느 장난감을 가지고 놀 것인가를 가지고 시작된다. 그렇게 한 아이가 울면 어찌어찌 어르고 달래며 다툼의 씨앗이었던 욕구로부터 다른 새로운 욕망으로 시선을 돌리기 바쁘다.


간식을 먹는 것도 예외가 아니어서 하필 한 봉지만 남아있는 경우에는 절대로 그 간식의 존재를 들켜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평소 즐겨먹거나 딱히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던 것이라고 할지라도 필경 또 누군가 한 아이가 울면서 상황이 마무리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한 봉지 남아있는 젤리를 조카가 먼저 발견해서 선점해둔 터였다. 아들은 다른 놀이에 정신이 팔려있다가 뒤늦게서야 사촌 동생이 손에 쥐고 있는 젤리 봉투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예상했던 대로 젤리로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아차.. 이번엔 아들이 울겠구나 싶은 생각에 어떻게 또 달래야 하나 머리가 하얘지려던 찰나, 울고 불며 떼를 쓰지 않고 혼자 먹으면 맛이 없다며 자신에게 젤리를 줘야 하는 이유를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아이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사실 아들의 언어 사용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아직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기보다 어딘가에서 보고 들었던 말을 비슷한 상황에 연습 삼아 사용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더 많다.


아이의 말은 부모가 평소 자주 쓰는 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한창 모방에 재미를 붙여 적재적소에 자신의 활용 능력을 뽐내고 싶어 하는 것이 보인다. 그렇게 아이는 부모의 말을 답습하며 언어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조금씩 쌓아 올린다. 그래서 아이들의 어휘나 문장, 심지어 톤과 음정의 높낮이조차 부모의 말과 닮아있는 경우가 꽤 많다. 학부모 상담을 위해 학부모와 첫 대면을 할 때 인사만 듣고도 누구의 부모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이가 자라면 내가 되겠구나. 아이가 어떤 언어를 사용하며 사는 사람이 될지,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이 될지 부모는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약간의 변주가 가미된 또 다른 내가 될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생에 이토록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부모라는 생각에 다시금 어깨가 무거워진다. 큰 영향력을 끼친다는 말조차 부모의 책임과 무게를 표현하기엔 한없이 가벼워 보인다. 어디 영향력을 끼친다 뿐이겠는가. 자식과 마주 한다는 것은 나와 몹시 닮아있는 한 인간을 재생산하는 일이다. 그런데 어찌 자식 앞에서 말과 행동을 조심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내가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의 말, 무심결에 취한 단 한 번의 행동이 아이의 머릿속엔 강렬하게 새겨지고 있다. 그런 뒤 살아가며 마주하는 대부분의 상황 안에서 아이는 자신이 보고 들은 대로 말과 행동을 하고 그에 어울리는 선택을 해나갈 것이다. 그런 선택의 결과가 어떤지 우리는 이미 자신의 삶을 통해 알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기에 자식만큼 하얀 도화지가 없다. 자식은 내 분신이라는 말이 단지 생김새가 닮아 있다는 것만을 근거로 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면까지도 나와 꼭 닮아있는 존재, 그것이 바로 자식이기 때문이다. 자녀가 있는 사람이 조금 더 빨리 철들 가능성이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 아이의 인생에 막대한 부담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것은 책임감이다.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내 자식의 앞날이 달라질 것이라는 막연하지 않은 명확한 인식을 하는 것, 그것이 부모를 어른으로 만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