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내편이라는 믿음
아들: 엄마 나 메모리게임 할건데 좀 도와줄래?
엄마: 그래, 뭘 도와주면 될까?
아들: 카드를 뒤집어야 되는데 좀 도와줄래?
좋아하는 보드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준비의 과정이 필요하다. 혼자서 많은 수의 카드를 뒤집어 놓기 귀찮았던지 아들은 엄마에게 천진한 표정으로 도움을 요청한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타인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건넨 적이 언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왜 도움이 필요하면서도 도와달라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는 것일까. 도움이 필요치 않아서, 혼자서 뭐든 척척 해낼 수 있어서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것일까?
그보다는 아마 도움을 요청하는 내 모습을 통해 타인으로부터 그 정도도 혼자서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에, 혹은 짓눌리는 책임감에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해결해내야만 한다는 강박감 때문에, 또는 약한 모습이 혹여나 나중에 발목을 잡는 약점이 될까 싶은 불안감에 휩싸여 도와달라는 말을 선뜻 꺼내기 어려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정도 일은 혼자 알아서 해야지, 사람이 책임감 없이 해보지도 않고 도와달라는 말부터 꺼내네, 쯧쯧... 저래서 어디 나중에 무슨 일을 맡길 수나 있겠어" 같은 말이 두려워 나이를 먹을수록 도와달라는 말을 입에 담기가 무서워진다. 그래서인지 도와달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나이가 어릴 때나 가능한 일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아이는 단순히 나이가 어려서 도와달라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있었던 것일까. 그에 대한 답은 단연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아이 역시 지나가는 행인이나 슈퍼마켓 아저씨에게는 도와달라는 말을 선뜻 건네기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도와달라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있는 사람은 양육자 혹은 교육기관의 교사 정도에 국한된다.
그렇다면 아이가 그들에게 도와달라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믿음 때문이다. 저 사람은 무조건 나를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 내가 몇 번 도와달라고 해봤는데 그때마다 웃는 얼굴로 기꺼이 내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낑낑거리면서 내 어려움을 해결해 주었던 기억. 그런 경험이 쌓이면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쉽게 손을 벌릴 수 있는 사람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무조건적인 선행을 기대할만한 사람이 있는가. 자신의 수고로움을 감수해내면서, 어쩌면 조금은 자신이 피해를 입을지도 모를 위험을 감내하면서까지 나를 위해 발 벗고 나서 줄 사람, 사실 성인이라면 그 정도는 바라지도 않을 테다. 그저 뒤에서 욕이나 안 하고 이상하게 말을 만들어서 어디에 전하지나 않으면서 나의 일을 조금만 거들어줄 수 있는 사람. 그 정도면 충분한데도 우리는 왜 쉽게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혼자서 끙끙대며 시간과 에너지를 비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는가.
두렵기 때문이다
분명 세상에는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보다 많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정말 선한 사람인지, 선한 척하는 사람인지, 누군가에겐 선하지만 나에게도 과연 선한 사람인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살면서 맞아온 몇 번의 뒤통수는 그렇게 조용히 불신의 씨앗을 심어 두고 사람을 쉽사리 믿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누군가가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괜찮다면 도와줄 수 있느냐며 조심스레 요청을 할 때면 웬만하면 그에 응하려고 하는 편이다. 그들은 용기를 내고 있는 것이며 선의를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또 그렇게 이용당하기도 하고 사기를 당할 위험에 처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정교하게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내 감각을 탓할지언정 신뢰를 내던지는 행동을 하기에는 아직 사람에 대한 마음이 완전히 닫히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혼자 잘나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텐데 우리는 모두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며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렇게 행동하는 타인과 나를 바라보며 외로울 텐데, 분명 외로워질 텐데...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한편으로는 분명 그간 데어온 삶의 상흔이 있어서 그런 것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뭐라 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게 된다.
그저 믿어보자는 말로 행복 회로를 돌리기엔 찢어진 상처 위에 한번 더 상처를 덧대 치유할 수 없는 깊은 트라우마를 남길까 걱정이 되면서도, 마음의 문을 닫고 내 할 일만 알아서 잘하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살아가자고 하니 그 또한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길인 것 같아 이도 저도 못한 채 갈팡질팡 하는 모양새가 꼭 헤어진 연인을 앞에 둔 채 다가서지도 돌아서지도 못하는 꼴 같아 처량하고 우습게 느껴진다.
사는 것이 다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드는 것들 사이에 낀 채 어떻게 좀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이쪽으로 조금 저쪽으로 조금씩 움직여보며 때로는 잘했다고, 때로는 잘못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하고 자책하길 반복하며 소진되어 가는 것. 그 과정의 어디 즈음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무뎌지거나 여유를 갖추게 되는 것이리라. 무뎌짐이 여유처럼 보이고, 여유가 소진처럼 보이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때쯤이면 조금 더 선명한 길을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다소 막연한 기대라고 해도 좋다. 구체적인 기대를 할 수 없을 때에는 막연한 기대라도 해보는 것이 삶에 도움이 되는 길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