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꼼수
아빠: 다 읽었으면 제자리에 책을 꽂아놔야지
아들: 싫어
아빠: 그건 좋은 행동이 아니야
아들: 유치원에서는 제자리에 꽂아놔
아빠: 유치원에서는 정리하는데 집에서는 왜 안 해?
아들: (정적)
아빠: 유치원에서 정리하는 것처럼 집에서도 정리하면 진짜 멋진 사람이야
아들: 나는 그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 아니야
아빠:...?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 이 조그만 5살 아이가 벌써 성인의 위대한 가르침을 깨달았을 리 만무하다. 그렇다. 이 녀석은 지금 뒷정리가 하기 싫어 잔꾀를 부리는 중이다.
아이는 이미 혼자서 신발을 신을 줄 알면서도 집에서 외출을 준비할 때면 부모에게 신발을 신겨달라고 한다. 때로는 때를 쓰기도 하고 때로는 씨익 웃으며 어디 아쉬운 사람이 한 번 신겨보라는 듯 짓궂은 미소로 여유를 부리기도 한다. 늘 시간에 쫓겨 아이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신발을 신겨 집을 나서는 때가 많았다.
어느 날 아이가 아파 병원에 데리고 갈 일이 생겨 유치원에 픽업을 갔다. 자신을 데리러 온 아빠가 반가웠던지 최선을 다한 달음박질로 품에 안기는 아이의 사랑스러움에 황홀해진 마음이 헛웃음을 동반한 기막힘으로 뒤바뀌는 데는 찰나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유치원 출입구에 서서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고 자기 신발장에서 신발을 꺼낸 뒤 실내화를 가지런히 넣고 신발을 혼자 척척 신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황당해 절로 터져 나오는 헛웃음과 함께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집에서도 아이가 혼자서 신발을 아주 안 신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 신발을 혼자 신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아이는 신발 신는 것을 도와준대도 혼자서 낑낑거리며 자기 혼자 할 수 있다고 한사코 도움을 거절했었다. 아마도 그것은 스스로 해내고 싶다는 성취욕에 대한 갈망과 부모에게 칭찬받고 싶다는 인정의 갈망이 뒤섞여 나온 행동이었으리라. 하지만 이제 능숙하게 혼자서 신발을 신게 되었으니 성취에 대한 갈망은 사라졌을 테고 이미 신발 혼자 신는 것으로는 부모에게 충분히 인정받았으니 굳이 같은 내용으로 인정을 갈망하지 않아도 될 만큼 욕구가 충족되었으리라.
유치원은 아이에게 새로운 환경이다. 그곳에서 마주하는 새로운 사람들로부터 아이는 인정받고 싶었으리라. 그렇게 자신이 잘하는 것을 하나씩 선보이며 때로는 뽐내기도 하고 때로는 주눅 들기도 하며 인정과 좌절의 감정을 맛보며 성장하고 있을 테다. 그렇게 생각하니 집에서 신발 신는 것 정도로 더 이상 인정을 갈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굳이 뽐내지 않아도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것은 건강한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테니까. 그리고 그다음 단계의 스스로 만족할만한 성취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일 테니까.
인정받고 싶은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할 때 우리는 끊임없이 그 사람에게 나를 좀 봐달라며 애걸하게 된다. 어린 시절 나를 방임했던, 이제는 노인이 된 부모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모습, 마음이 떠난 연인의 쌀쌀맞은 태도를 돌리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내 승진의 목줄을 잡고 있는 상사에게 내가 이만큼 유능하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며 어필하는 부하직원의 모습, 이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왜곡된 인정의 관계성이다.
특정 인물과 충분한 인정을 주고받게 되면 어느 시점에 이르러 더 이상 인정을 갈구하지 않게 된다. 그저 평안한 부동심의 상태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 시점이 바로 진정한 인간 대 인간의 관계, 즉 대등한 관계 맺음의 상태로 진입하는 초입이다. 그런 관계 안에서야 비로소 인간은 진정으로 나눔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준 것을 기억하지 않고, 경중을 따지지 않고, 베풂을 베풂으로조차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자연스러운 것, 서로가 대등한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의 꾀부림이 귀엽게 느껴졌다면 이제는 다음 인정의 욕구를 살펴줄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신발을 스스로 신고, 혼자 목욕을 하고, 홀로 버스를 타며 아이는 조금씩 부모의 조력을 발판 삼아 자신의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다. 언젠가 부모와 대등한 한 인간으로 우뚝 마주할 날을 기대하며 아이의 무엇을 또 인정해 줄지 끊임없이 살피는 것이 부모가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