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아빠: 길에 꽃이 예쁘게 피었네
아들: 엄마가 좋아하겠다
아빠: 그러게 꺾어다 주면 좋겠는데 꽃을 꺾으면 안 되겠지?
아들: 꺾으면 죽잖아. 눈으로만 보자
아빠: 그래 그럼 아쉬우니까 사진이라도 찍어다 줄까?
아들: 대신 내~가 선물이라고 하자
아빠: @_@
꽃을 꺾으면 안 된다는 말을 아이의 입에서 듣고 싶어 유도신문을 던졌는데, 아이는 예상치 못한 대답으로 아빠의 마음을 또 한 번 붕 뜨게 한다.
자신이 엄마에게 선물이라는 말의 근원은 차곡차곡 쌓여온 사랑을 통한 자신감의 발현이 분명하다. 자신이 타인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분명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은 함부로 행동할리 없다. 게다가 자신을 의미 있게 여기고 있을 사람 앞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것은 믿어준 사람에 대한 배신이자 쌓아온 신뢰를 무너뜨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믿음과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아온 서로의 세상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른 무엇보다 커다란 붕괴인 탓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족쇄를 채우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뭉근하면서도 부드럽게 쌓아 올린 그 기분 좋은 끈끈함에 대해서 어느 누가 부정할 수 있으랴. 의미 있는 타인이 곁에 없는 사람은 스스로를 소중하게 생각하기 어렵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길 수 있을 리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내 손이 아픈 줄 알아야 타인의 고통에도 공감할 수 있듯, 내 등이 따듯한 줄 알아야 타인의 등도 따듯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사랑을 충족시킬 제1의 아지트인 가정에서 충만한 사랑을 받지 못한 이들이 다른 곳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사랑과 인정을 갈구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지나친 신체적, 정신적 유대감을 강조하며 친밀감으로 포장된 덫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 사람이 넘쳐난다. 애인에게, 친구에게, 스승에게, 자신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상급자에게, 혹은 한참 나이가 적은 후배에게, 애완동물에게, 심지어는 만화 속 캐릭터나 영화 속 등장인물에게. 이는 단순히 좋아서 즐기는 것과 다른 양태를 띤다. 단순히 좋아하는 수준이라면 집착하지 않고 상처받지 않는다. 일정량의 집착과 상처를 끌어안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충분히 건강하게 다시 설 수 있다. 그것이 건강한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의 가장 커다란 능력인 회복탄력성이다.
건강한 사랑을 받지 못한 상태로 자라난 사람들은 끊임없이 인정과 관심을 갈구한다. 그것은 사랑과는 다르다. 사랑을 주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하고, 관계의 중심에 있어야 하며,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만 바라보도록 유도한다. 이것은 오직 나만을 위한 관계다. 하지만 세상에 그런 관계는 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요구는 당연하게도 오래가지 못해 끊어진다. 그렇게 타인 없이 오롯이 홀로 서지 못한 인간은 당연스럽게 스러져갈 수밖에 없다.
내가 너에게 선물이고 네가 나에게 선물이라는 마음은 그래서 귀하다. 어디 귀할 뿐인가, 그것은 한 인간의 인생을 관통하며 올곧게 걸어 나갈 수 있도록 지탱해 줄 그 무엇보다 강렬한 고향인 셈이다. 고향을 잃은 사람의 눈을 옆에서 바라본 본 적이 있는가. 고작 눈빛에서도 공허함과 허전함이 그토록 강렬하게 전해지는데 그 속을 어떻게 짐작할 수 있을까. 좋은 부모들은 그렇게 아이에게 서서히 고향 같은 존재가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