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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Sep 13. 2023

우아한 거짓말

제발, 제발, 제발!

좋은 창작물은 여러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담백하고도 온전히 전달해 낸다. 영화 우아한 거짓말은 그런 의미에서 좋은 영화임이 분명하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주인공 자살한다. 학교폭력으로 한해 목숨을 끊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전 세계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 방어전을 20년째 성공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대체 얼마나 많은 죄와 우울을 품고 있는 나라인가. 보건복지부에서 발행한 2023년 자살예방백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10대 20대 30대의 자살률(10만 명 당 명)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더군다나 10대에서 30대의 사망원인 1위는 사고나 질환이 아닌 자살이다. 이는 건강하지 못한 사회라는 말로는 그 위험성을 충분히 표현해 내기 힘들 정도로 상징적인 지표임에 틀림없다. 영화는 어느덧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만성질환으로 자리 잡은 청소년 자살과 학교폭력을 다룬다.


"사과하실 거면 하지 마세요. 말로 하는 사과는요, 용서가 가능할 때 하는 겁니다."


학교폭력의 희생자이자 영화의 주인공인 천지(김향기)의 엄마(김희애)는 가해자(김유정)의 엄마(김정영)가 사과를 하려 하자 살기 어린 거부감을 드러낸다. 진심 어린 사과는 그것의 실행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감동적이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순간에 진심 어린 사과보다 면피용 사과를 더 자주 마주한다. 그리고 그런 사과는 피해자로 하여금 분노만을 일으킨다. 교실에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진심 어린 사과보다는 면피용 사과를 남발할 때가 많다. "어? 기분 나빴어? 미안 나는 장난이었는데", "준비물 못 챙겨 와서 죄송합니다~~~ 엄마가 안 챙겨 줬어요", "야 내가 아까 사과했잖아 사과를 했으면 받아줄 줄도 알아야지", "나는 분명히 사과했다?" 이런 사과는 모두 자신을 향해 있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 그저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고자 하는 도피처, 그렇게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은 언제나 손쉬운 사과 한마디로 신에게 구원이라도 받았다는 듯 자신에게 면죄부를 부여한다.


"당신들 평생 내 얼굴 보면서 살아 봐..."


천지(김향기)의 엄마(김희애)는 세 들어 살던 집에서 쫓겨나 새로운 집을 구해야 했다. 그리고 그녀는 가해자(김유정)가 사는 아파트로 이사 가기로 결심한다. 가해자(김유정)의 부모는 집 근처에서 중국집을 한다. 이사 첫날부터 중국집에 들러 짜장면을 먹고 수시로 가게 앞을 지나다니며 가해자의 엄마(김정영)와 마주침을 의도한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가해자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복수는 무엇일까. 죽이고 싶은 마음을 끝끝내 실행하지 못하고 꾹꾹 눌러 담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피해자 가족들은 가해자의 가족이 지옥불에 떨어지기만을 바랄 테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천지의 엄마는 자신이 지옥에 떨어질 것을 감수해 가며 가해자의 곁으로 다가선다. 자신의 얼굴을 자꾸 들이밀 평생 씻을 수 없는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기를 바라며.


"천지요? 불쌍해서 놀아줬어요."


친구라는 탈을 쓰고 한 사람을 우스갯거리로 만들고, 선물을 가장하여 금전을 갈취한다. 천지에게만 약속시간을 다르게 알려준 뒤 패거리들과 미리 모여 험담을 하고, 뒤늦게 나타난 천지를 앞에 두고 모여있던 아이들은 단톡으로 자기들끼리 낄낄대며 비웃는다. 놀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자신이 놀아준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며 누군가는 그렇게 괴롭힘을 주도하고 누군가는 맞장구를 치며 누군가는 불편해하면서도 무리에서 이탈될까 두려워 침묵하는 사이, 그렇게 한 아이의 정신은 서서히 죽어간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적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럼에도 가해자는 끝까지 뻔뻔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미숙한 것이 아름다울 나이인 아이의 모습은 오간데없이 그 어떤 어른보다 영악하고 괴랄한 논리로 자신의 악행을 무장하는 가해자의 모습은 악귀를 연상케 한다.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으나 사람이 아닌 것, 그들은 가히 악마와 닮아있다.


"살다 보면 엄한 사람한테 속 얘기 할 때도 있는 거야. 엄한 사람은 비밀을 담아 둘 필요가 없잖아. 내가 바로 그 엄한 사람이야."


천지(김향기)는 공부를 하러 동네 도서관에 간다. 그곳에서 공무원 준비를 하는 추상박(유아인)과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된다. 그리고는 가족에게도 하지 못한 말, 친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을 스스럼없이 꺼내 놓는다. 천지가 죽은 뒤 화연(김유정)의 농간에 휘둘린 만지(고아성)는 천지와 추상박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그리고 그 의심을 풀기 위해 추상박을 찾아간다. 하지만 자신도 알지 못했던 천지의 속마음을 이야기해 주는 추상박을 마주하며 자신이 화연의 혀에 놀아났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추상박 역시 학교 다닐 때 화상자국 때문에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한 경험이 있다. 그런 아픔이 있었기에 소녀에게 눈길이 갔고 소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리라. 천지에게 추상박의 존재는 가뭄에 내린 단비처럼 반가운 존재였으리라. 인간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존재가 때로는 엄한 사람일 때가 많다는 것을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며 알게 된다.


"지나고 나니 아무것도 아니지? 고마워, 잘 견뎌줘서"


엄마, 언니, 화연(가해자), 미라(친구였던 방관자), 그리고 자주 가던 도서관 책장 속에 마지막 하나, 천지는 죽기 전에 5개의 편지를 남긴다. 천지는 마지막 편지를 누구에게 남긴 것이었을까. 도서관에 돌아와 다시금 편지를 읽으며 생의 의지를 다질 자신을 위해 썼던 것일까. 우연히 책을 뒤지다 자신의 편지를 발견할 미확정의 인물을 응원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마도 그 편지는 감독이 비슷한 시절을 보내고 있을 또 다른 천지에게 보낼 희망과 응원의 메시지였을 테다. 죽지 말고 꼭 살아남기를, 기어코 살아서 버텨내기를 바라는 마음은 감독뿐 아니라 모든 어른의 마음일 테다. 살아봐야 별 것 없는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그 사이에 빛나는 작은 순간들이 분명 존재하고 있음을, 그런 작은 반짝임을 느껴볼 새 없이 너무 빨리 질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를 안타까운 소년과 소녀의 마음에 감독의 한마디가 가 닿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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