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서평> 동화 넘어 인문학

현실 넘어 어딘가

by 정 호

'동화 넘어 인문학'의 저자가 기억하는 최초의 독서는 어릴 적 포목점을 운영했던 어머니가 이불과 맞바꾸어 구입해 준 세계 동화 전집이다. 그는 성장하며 잊고 지냈던 독서라는 자신의 뿌리를 사회에 나온 지 한참 지난 뒤에서야 다시금 돌아보기 시작한다. 저자는 인문학을 정치, 경제, 사회, 역사, 학예 등 인류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것으로 정의 내리며 인문학을 그저 어렵기만 한 것으로 생각했다. 어렵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인문학이 '잘 먹고 잘 사는 법'에 활용되는 것을 바라보며 저자는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동화라는 소재로 새로운 형태의 인문학 접근 방식을 제시하며 자신과 같이 인문학에 대해 거부감이 있는 사람들이 동화를 소재로 쉽게 인간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기를 권한다. 그렇게 작가는 동화와 고전을 엮어 삶을 관통하는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어놓는다. 인문학은 결국 나와 세상에 대한 학문이다. 나를 알고 세상의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질문은 필연적이다. 그렇게 나를 향한, 그리고 세상을 향한 질문을 던지며 우리는 각자의 인문학을 완성시켜 나간다.


이 책 역시 한 인간의 인문학적 성찰이 담겨 있다. 인문학이 정치, 경제, 사회, 역사, 학예 등 인류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학문이라는 저자의 정의에 숟가락을 올려본다면 인문학은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알아가려 노력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음식을 통해서도, 게임을 통해서도, 여행을 통해서도, 연애를 통해서도, 스포츠를 통해서도 우리는 인문학적 사고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인간 삶과 관계있는 모든 것에는 어떤 통찰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중 자신과 가장 맞닿아 있는 동화를 택했다.


우리는 이미 모두 인문학자로서의 가능성이 있다. 자신과 맞닿아 있는 것들로부터 조금씩 생각해 보는 것, 그것이 인문학이기 때문이다. 개똥철학이라고 할지라도 끊임없이 사유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언젠가 찾아올 허무라는 삶의 늪에서 나를 끌어올릴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기 때문이다. 사유하지 않는 인간은 언제고 반드시 붕괴될 위험이 있다. 삶과 세상이 늘 혼란한 탓이다.


지나온 시간을 떠올려보면 늘 목표를 향해 달리며 살아왔던 삶이었으나 크게 확대해서 보면 우물쭈물했던 시간들이었다. 결과가 두려워 시작에 앞서 우물쭈물했고 손실이 두려워 선택에 앞서 우물쭈물했다. 이 책의 첫 번째 챕터는 나처럼 우물쭈물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못했던 사람들에게 그 원인을 짚고 나름의 위안을 준다. 저자는 이솝우화에 나오는 '당나귀와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엮어 망설임을 긍정한다. 그간 이 동화를 떠올릴 때면 남들의 말에 따라 당나귀에 아들이 탔다, 아버지가 탔다, 결국은 당나귀를 짊어지고 간다는 이야기에 무책임하게 뱉어대는 다른 이의 말에 휘둘리지 말라는 교훈이 담겨있는 줄로만 알았다. 다른 이의 말에, 미디어와 사회가 부추기는 공식에 휘둘리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어찌 말처럼 쉬운 일일까. 저자는 이솝우화에 더해 '피로사회'에서 지적하는 우리나라의 성과지향적 삶으로 인한 피로와 우울감을 섞어가며 우리의 망설임을 긍정한다. 화살이 멀리, 그리고 정확히 날아가기 위해서는 활시위를 힘껏 당긴 채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어야 하듯 우리의 망설임은 무기력 때문에 멈춰있는 상태가 아니라 하지 않을 힘을 바탕으로 활동 중인 정제된 상태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작가의 통찰에 감탄과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는 늘 누군가가 우리의 마음을 읽어주길 바라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읽고 동시에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작업이다. 인문학 공부를 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공동 치유의 과정에 참여하고 있음을 뜻한다. 사유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런 집단에 속해 있을수록 각자는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공감과 치유를 건네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생성되어 흐르기 때문이다.


스펙터클이란 지배층의 그칠 줄 모르는 자화자찬의 산물이다.
- 스펙터클의 사회(기 드보르) -

수많은 공주 이야기 중 백설 공주가 가장 나쁘다는 저자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오직 아름다움이라는 하나의 가치에 함몰되어 모든 사건이 전개되며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아름다움을 절대적인 삶의 기준으로 삼아 행동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조차 자신이 세운 것이 아닌 거울이라는 타자에 의해 정립되었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에게 오직 아름다움만이 절대적인 가치이며 아름다우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는 잘못된 가치관을 심어줄 수 있다는 데 그 이유를 둔다. 그리고 거울이라는 외부의 외침은 현대사회에서 미디어를 통해 그대로 적용되고 있으며 외부의 기준에 우왕좌왕하는 우리 역시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마녀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에서는 우리 사회가 온통 스펙터클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스펙터클 때문에 우리의 인생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스펙터클이란 구경거리를 뜻하며 구경거리는 자극적이고 역동적일수록 존재의 가치가 높아진다. 하지만 스펙터클이 화려해지고 다양해질수록 그것을 구경하는 인간은 수동적이고 불행해진다.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행동에서는 멀어지기 때문이다. 능동적인 인간은 뛰어들어 행동하는 인간이지만 스펙터클에 함몰된 인간은 결코 행동하지 않는다. 흔히 셀럽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TV를 보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보는 것보다 행하는 것이 확실히 재미있기 때문이고 행할 수 있는 시간적, 경제적, 정서적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 드보르는 스펙터클이란 지배층의 그칠 줄 모르는 자화자찬의 산물이며 그것을 수동적으로 바라보는 다수의 사람 때문에 스펙터클은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확실하게 불행과 무기력에 빠진다.


그는 일종의 문화적인 양식에 의해 부여되는 성격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과 전적으로 동일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 자신에게 기대하는 그런 상태로 변화된다. 그와 함께 '나'와 외부 세계와의 갈등은 사라지고, 고독과 무력함을 두려워하는 의식도 사라진다. 개인적인 자아를 버리고 자동인형이 되어 주위 수백만의 다른 자동인형과 동일해진 인간은 이미 고독이나 불안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대신 그가 지불한 대가는 혹독하게 비싼 것으로, 그것은 바로 자아의 상실이다.
- 자유로부터의 도피 (에리히 프롬) -


사회가 정해놓은 규칙, 세상 사람들이 옳다고 말하는 길, 소위 대세와 주류라 불리는 이데올로기에 따르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마음을 우리는 늘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저자는 동화 빨간 구두 이야기와 에리히 프롬의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들여다보며 개성과 자유에 대해 말한다. 쉬지 않고 춤을 추게 만들어 결국 구두 신은 발을 잘라냈다는 빨간 구두 이야기는 잔혹동화로 널리 알려져 공포 영화나 무서운 이야기의 소재로 종종 차용된다.


하지만 저자는 빨간 구두 이야기 속에서 개성의 말살을 본다. 구두라고는 빨간 구두 하나여서 어머니의 장례식장에 빨간 구두를 신고 간 소녀, 세례를 받으러 가서도 빨간 구두에 정신이 팔려 제대로 된 기독교적 의식을 치러내지 못하고 영원히 춤춰야 하는 형벌을 받는 소녀. 동화는 세속적 규율에 따르지 않으면, 제대로 사회화가 되지 않으면 처벌받게 된다는 일종의 교훈을 목적으로 쓰였지만 "동화 넘어 인문학"의 저자는 되려 동화를 소개하며 자아의 상실을 우려한다.


다른 생각,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획일성과 지나친 동류의식을 추종하는 사회,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우리 사회를 걱정한다. 생각해 보면 빨간 구두라는 동화를 해석하는 것 또한 늘 비슷했던 것 같다. 두렵고 공포스러운 존재 이외의 해석으로 접근한 작품을 접해본 기억이 없다. 동화를 하나 읽으면서도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시선을 생성해 낼 줄 아는 사람이 다양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 그것이 저자가 바라는 인문학이 가야 할 길이자 개인이 행복해지는 길이며 우리 사회가 건강해지는 길일테다. 다양한 시선으로 다양한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개인의 역량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자연스레 느끼고 행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어본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