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 호 Oct 11. 2023

다음 소희

거대한 체제 아래에서 무엇을 선택하는 어른이 될 것인가  

누구에게나 맘 붙일 곳이 필요하다. 맘 붙일 곳 하나가 때로는 한 사람의 목숨을 지탱시키기도 한다. 영화 "다음 소희"는 착취를 위해 차곡히 짜인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에서 맘 붙일 곳 하나 없는 어느 소녀의 좌절을 그린 작품이다. 견고한 체제 아래에서 소모될 다음번 희생양이 누구인지 묻는 영화의 제목은 이 영화가 실화라는 점에 힘입어 더욱 섬찟하다.


"나도 이제 사무실 여직원이다?"라며 친구들에게 밝은 웃음을 짓는 소희(김시은)는 생명과학고등학교(구 농업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여고생이다. 대기업에 취직했다며 밝게 웃던 그녀의 모습 콜센터 사업장에 들어서 무표정하게 얼어붙은 얼굴 위로 오버랩된다. 실습이지만 직원 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그저 이삼일 곁눈질로 배운 것이 그녀가 수행해야 할 직무의 밑바탕이 된다. 실적을 강요받지만 실적을 올린 만큼 성과를 지급받지 못하게 만드는 대기업의 허술한 계약 조항은 우리 사회가 노동의 가치를 얼마나 차등적으로 대우하는지, 사회 곳곳에서 근로자의 권리가 너무도 쉽고 위태롭게 누수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렇게 한 소녀의 희망은 단 며칠 만에 좌절로 탈바꿈한다.


생기발랄하던 열아홉 소녀는 그렇게 조금씩 미소를 잃어간다. "나 회사 그만두면 안 될까?"라며 엄마에게 슬쩍 힘든 기색을 내비치는 소희, 하지만 엄마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인지 소희의 말을 못 들은 척 외면한다. 지옥 같던 회사에서 그나마 자신을 인간답게 챙겨주던 팀장은 인간성의 말살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고, 직장에서 쌓인 스트레스로 인해 가까이 지내던 친구와 다투게 된다. 남자친구 역시 또 다른 장소에서 실습을 하며 인간성을 잃어가고 있던 탓에 소희를 살뜰히 챙기지 못한다. 유일한 탈출구이자 기쁨이었던 춤은 그녀에게 더 이상 즐길 수 없는 사치가 된 지 오래고 고통에 가득한 절규로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느냐며 담임에게 따져봐도 담임은 그저 취업률이라는 실적 말고 다른 것에는 관심 없는 듯 보인다. 세상의 풍파를 견뎌내기에 아직 어린 소녀였던 우리의 소희는 그렇게 어느 곳 하나 맘 붙일 곳 없이 흔들리다 스스로 스러져버리고 만다.


영화는 분량의 절반을 나눠 마치 1부와 2부처럼 구분 짓는다. 1부는 소희(김시은)의 이야기, 2부는 유진(배두나)의 이야기. 유진은 죽은 소희의 사건을 조사하며 이런저런 부조리들과 마주한다. 소희와 같은 직장에 다니다가 일을 그만두고 백화점에서 일하는 한 소녀를 찾아가 이것저것 묻던 와중, 취업에 나갔다가 그만두고 돌아오면 학교에서는 빨간 명찰을 채우거나 빨간 조끼를 입힌 채 청소를 시켰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왜 그렇게 하는 것이냐는 유진의 질문에 "취업률을 떨어뜨린 죄"라고 답하는 소녀의 눈에는 세상에 대한 증오와 환멸이 가득하다. 죽은 소희의 부모에게 소희가 어떤 일을 했는지 묻고 춤을 좋아하는 아이였다고 말하는 유진은 전혀 "몰랐다"는 부모의 대답 앞에 어떤 반응도 내어놓지 못한다. 왜 일을 덮지 않고 자꾸 크게 만드냐는 상관의 질타에 "경찰이 시키는 일만 하냐"면서 명하고 죽은 소희의 학교에 찾아가 학교의 실정을 파악하며 담임교사와 교장에게 "이게 학교냐 인력 파견소냐"고 일갈하는 배두나의 모습은 관객으로 하여금 시원함과 답답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유진은 소희의 죽음을 수사하며 이것이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우리 사회를 거대하 뒤덮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점차 깨닫는다. 모든 것이 자본의 논리에 의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유진은 교육청 장학사를 만나러 가지만 "이젠 교육부까지 찾아가시게요? 그다음은요?"라며 유진의 순수함을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 되묻는 장학사의 한마디에 더 이상 수사를 진행할 의지를 잃는다. 그렇게 유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비슷한 처지에 처한 아이들의 맘 붙일 곳이 되어주는 것뿐이라는 듯 소희의 남자친구를 만나러 간다. 실습하던 곳에서 벌어지는 부조리를 참지 못하고 폭력을 행사한 희의 남자친구 태준(강현오)은 택배 상하차 업무에 배치된다. "또 욱하면 누구한테라도 말해. 나한테 연락해도 돼요." 유진은 그렇게 태준에게 맘 붙일 어른이 되어주고 싶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영화 "다음 소희"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비춘다. 청소년 노동 문제와 사회적 무관심, 실적에 의해 존폐가 결정되는 기업과 교육 기관의 모습과 그 안에서 톱니바퀴처럼 굴러갈 수밖에 없는 개인의 한계, 위에서 시키는 일만 처리하는 공무원 조직의 관습적 행태, 학교에서 교육청으로, 교육청에서 교육부로, 그리고 그다음까지 연결되어 있는 뿌리 깊고 강대한 구조가 빚어내는 의도치 않은 폭력성. 이런 것들은 과연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까.


고등학생 시절 신문배달 아르바이트를 했던 적이 있다. 당시 최저 임금 궁금해 인터넷에서 연도별 최저 임금을 검색해 봤더니 2005년도 최저임금은 2840원으로 나온다. 당시 하루 4시간씩 신문을 돌렸고 새벽시간이었던 탓에 야간수당까지 받았어야 했겠지만 야간수당은 고사하고 단순히 최저임금으로만 계산해도 2840원 ×4시간 ×20일=227,200원을 받았어야 했으나 한 달간 일하고 손에 쥔돈은 10만 원에 불과했다. 시급으로 따지면 1250원을 받고 일한 셈이니 최저임금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노동력 착취를 당한 셈이다. 20년 전에는 지금처럼 인터넷을 통한 공론화도 쉽지 않았고 정보를 얻을만한 플랫폼도 다양하지 않았기에 그것이 뭔가 부당한 일인 것 같다는 생각과 느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명확히 짚어내기 어려웠다. 어쩌면 이미 그런 것들을 알아낼 수 있는 경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세상 물정에 어두워 알지 못해 당했던 것일 수도 있다.


학생이란 아무래도 성인에 비해 세상 물정에 어둡기 마련이다. 그런 학생들이 건강하게 사회에 발을 내디딜 수 있도록 안전하게 조력하는 것이 어른이 해야 할 일이다. 유진 같은 어른이 소희 곁에 있었다면 영화 "다음 소희"의 결말은 조금 달라졌지 않았을까. 우리 곁에 있는 수많은 소희들이 더 이상 자본과 나쁜 어른들의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작은 등불이 되어 그들의 곁을 밝혀주어야 한다. 그런 어른이 되어주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 자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