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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Oct 30. 2023

성적표의 김민영

우리들의 성장통

사랑이 지금 죽을 것 같은 현재 진행형 열병이라면 우정은 끝난 후 시간이 지날수록 후유증이 커지는 만성염증과 같다.


열아홉과 스물, 그 경계에서 느끼는 청춘의 혼란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가 생각난다. 2001년 개봉한 "고양이를 부탁해"와 2022년에 개봉한 "성적표의 김민영"은 2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해가는 우정의 열병에 가슴 아파하고 있는 열아홉과 스물의 우리 모습을 담아낸다. 특별한 이유 없이, 특별한 갈등이나 사건 없이 그저 변해가는 상황 속에 자연스레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게 되어가는 우리는 그렇게 어쩌면 생애 최초로 타인과 나 사이의 다름을 진지하게 인지하며 어른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스물은 우리에게 투박하고 잔인하도록 너와 나의 다름을 가르친다. 서로의 다름을 알아차리지 못해서 투박하고, 서로 다르기에 조심하기보다는 달라서 불편해진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 바빠 잔인해진 우리는 그렇게 인식하지 못한 채 홀로 울고 서로를 할퀴며 조금씩 어른의 세상을 향해 걸어 들어간다.


한국 사람이 싫다는 민영의 외침은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는 절절한 절규였을까. 온갖 가식으로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가리며 살아가고, 이유도 모른 채 불안해하며 늘 경쟁하듯 살아야 하는 사람, 타인의 눈을 의식하기 바빠 자기를 들여다보며 살아갈 여유를 잃어버린 사람, 민영은 그런 사람들을 "한국 사람"이라는 한 단어로 손쉽게 정의 내린다. 하지만 영화 초반 민영이 지은 삼행시에는 누구보다 그런 한국사람이 되고 싶었던 민영의 속마음이 투영되어 있다.


김: 김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김 씨들이 모여 가장 효용 없는 한 사람을 추방하자고 회의를 했다.


민: "민영아"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변호하고 싶었다.


영: 영원히 제가 이대로 살아가진 않을 거예요.


영화에 등장하는 민영, 정희, 수산나 세 친구는 고등학교 절친이다. 셋은 시간이 날 때마다 삼행시를 지으며 그들만의 시간을 쌓아간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아온 시간은 특별함이 되고 그 특별함을 공유하며 서로 친구가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민영은 대학에 가고 수산나는 유학을 가고 정희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렇게 불과 몇 달 만에 달라진 서로의 처지로 인해 그들은 순간순간 각자 자신만 배려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며 조금씩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모여 고등학교 때처럼 삼행시를 짓고 서로의 근황을 나누곤 하지만 수산나는 한국 정반대의 나라로 유학을 가 있던 탓에 점심식사 시간을 쪼개 삼행시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매번 약속시간에 늦는 민영으로 인해 수산나는 자신을 배려하지 않는 친구들이 이기적이라 말하며 모임에서 빠진다. 정희 역시 알게 모르게 자신을 무시하고 무안함을 주는 민영에게 서운함이 쌓여간다. 민영과 정희는 방학을 맞아 서울에 있는 민영의 집에서 오랜만에 재회하기로 한다. 반가운 마음에 캐리어에 짐을 잔뜩 싸 찾아간 정희에게 민영은 하루만 있다 가는 것 아니었냐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친다. 자신이 집에 놀러 왔음에도 불만족스러운 시험성적에 대한 이의신청을 하느라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민영을 바라보며 정희는 자신이 투명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느낀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여러 캐릭터가 각자의 서사를 가지고 입체성을 부여받는 반면 "성적표의 김민영"은 민영과 정희의 대비가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정희는 민영의 일기를 통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민영의 속마음을 알게 된다. 늘 현실적인 것처럼 굴었던 민영에게도 한때 꿈이라는 것이 있었으며,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자기를 생각하며 대단하다고 여겼던 적도 있었다는 사실을. 민영 또한 정희의 이야기를 들으며 늘 비현실적이라고 퉁명스레 받아치고는 했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정희의 마음을 이해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사실 영화이기에 서로의 속을 이해하며 훈훈하게 마무리하는 편이 재미로도 미학적으로도 깔끔하기에 영화는 대부분 이런 형식으로 결론짓게 되지만 현실에서는 갈등 이후에 서로의 상처를 알아채고 보듬은 뒤 관계가 다시금 봉합되기보다는 한 번의 갈등 이후에 서로 갈길을 가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가 이런 류의 영화를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고 씁쓸한 미소를 짓는 이유 역시 영화와 다른 자신의 현실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는 수십 번을 다투고도 금세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웃고 떠들곤 했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는 한두 번의 다툼이 생기면 다음을 기약하기 어려워진다. 그리고 그 다툼의 원인이 생각보다 보잘것없을 때가 많다는 것이 우리의 안타까움을 더욱 배가시킨다. 갈 사람은 가고 올 사람은 오라며 관계에 초연해진 것처럼, 삶의 이치를 깨달은 것처럼 말할 때가 많지만 가까이 지내다 멀어진 이들을 하나씩 생각할 때면 가슴이 뻐근해진다. 앞으로 무엇을 하든 그때의 우리 같았으면 좋겠다는 포스터의 문구가 더욱 가슴을 저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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