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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Nov 22. 2023

멋진 하루

그렇게 그렇게  

함께하고 싶은 사랑이 있고 함께할 수 없는 사랑도 있다. 때로는 함께 하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사랑의 감정이 뒤늦게 솟아오르기도 한다. 사랑의 형태는 그렇게 헷갈릴 정도로 다양해서 각자가 느껴본 것을 사랑의 감정이라 생각하며 살아간다. 영화 멋진 하루는 사랑을 그린 영화다.


영화 초반에는 병운(하정우)이 삶을 대하는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내일이 없는 하루살이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를 보며 스멀스멀 올라오는 혐오감에 영화를 꺼버리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캐릭터를 어찌 주인공으로 삼았을까 하는 궁금증에 가까스로 인내심을 발휘하여 그 위기를 넘겼다.


영화는 경마장에서 시작한다. 희수(전도연)는 경마장에서 배팅하고 있는 병운(하정우)을 찾아온다. 오랜만에 재회인 듯 병운은 반갑게 희수를 맞이하지만 그런 병운에 비해 희수의 태도는 쌀쌀맞다. 빌려간 돈을 갚으라며 냉랭하게 병운을 바라보는 희수, 병운은 옛 연인이었던 희수로부터 350만 원을 빌린 뒤 잠수 이별을 시전 했다. 그렇게 그들이 헤어진 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길고도 짧은 1년의 시간 동안 희수와 병운은 각자 많은 일을 겪었다.


희수에게 빌린 350만 원을 갚기 위해 병운은 흡사 사기꾼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만큼 화려한 언변으로 친분관계를 맺고 있던 여러 여인들을 찾아다니며 돌려 막기를 시전 한다. 영화는 헤어진 연인이 아침에 경마장에서 만나 희수에게 돈을 빌린 병운이 350만 원을 갚기 위해 함께 움직이며 다시금 꾸역꾸역 350만 원을 빌려내는 하루를 그린다. 대략적인 개요만 보면 참으로 치졸하고 한심하기 그지없으나 툭툭 흘리는 대사와 배우들의 미세한 표정 처리를 보고 있으면 내공이 쌓인 장인의 솜씨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어느새 영화에 몰입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1년의 시간 동안 병운은 사업이 망했고, 결혼과 이혼을 겪었다. 희수 역시 파혼과 퇴사 등 삶의 풍파를 온몸으로 마주하며 버텨냈다. 그렇게 그들은 고달픈 상황 속에서 재회게 된다. 병운은 한량에 가깝고 희수는 냉담하다. 1년 사이 결혼과 이혼을 했다는 병운의 사정을 알게 된 희수는 그새 결혼에 이혼까지 했느냐며 실소를 짓는다. 병운은 자신의 사업이 망해서 힘들어하는 아내를 바라보기 괴로워 놓아주었다고 한다. 사랑했기 때문에 놓아주었고 사랑했기 때문에 함께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그가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진실해 보였다. 사랑하기에 고통을 나누고 싶지 않은 마음, 옛 우리네 아버지들의 사랑은 이런 형태가 많았다. 직장에서 치욕을 겪고 사업을 위해 굽신거려야 했을지언정 혼자서 감내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을 그들의 모습이 불현듯 하정우와 겹쳐 보인다. 어떤 고통은 나누면 반이 되지만 어떤 고통은 나누면 파국을 맞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유쾌하고 가볍게 상황에 대처하는 병운(하정우)을 바라보며 처음 그를 바라보던 나의 시선이 조금은 부드럽게 변했음을 느낀다.  


희수(전도연)는 그런 병운과 하루를 같이 보내며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는 듯해 보인다. 정말 돈을 받으러 온 것인지 비관적인 자신의 상황에 목놓아 울고 싶은 마음에 만만한 옛 연인을 찾아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처음에 차갑고 냉소적이었던 희수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조금씩 드리운다. 차 안에서, 햄버거를 먹으면서, 비 오는 길거리에서, 남의 집에서, 남의 사업장에서 희수는 병운에게 빌려준 돈을 받아내기 위해 불필요하고 수치스러운 상황을 겪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희수는 병운의 삶을 가만히 응시하게 된다. 사업도 망하고 이혼까지 해서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주제에 여전히 입은 살아서 가보지도 않은 스페인에서 막걸릿집을 차리고 싶다고 말하는 병운을 바라보며 희수는 그가 여전히 입만 산 허풍쟁이였음을 확신한다. 그랬던 그녀가 하루동안 병운과 함께 다니며 조금씩 웃기 시작한다. 희수는 마지막 돈을 받기 위해 병운의 초등학교 동창을 만난다. 남편 없이 마트 캐셔로 일하며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병운의 초등학교 동창으로부터 40만 원이 든 봉투를 건네받은 희수는 감정의 폭풍을 느낀다. 대체 이 여자들은 병운의 무엇을 보고 이렇게 돈을 빌려주는 것일까. 단순히 화려한 언변으로 여자 등골을 빨아먹는 제비쯤으로 생각했던 그가 여러 사람으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한 인간에 대한 프레임은 산산이 조각나 부서져버린다. 그리고 그 뒤에 딸려오는 것은 미안함, 사람도 제각각이고 사랑도 제각각이다. 희수가 생각했던 병운은 그저 한량에 가까운 사람이었지만 단순한 한량으로 정의하기에 병운은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다채로운 관계 맺음을 통해 쉽사리 정의 내리기 어려운 인물이 되어버리고 만다. 하루종일 돌아다닌 끝에 결국 350만 원 중 330만 원을 갚게 된 병운, 나머지 20만 원까지 모두 갚고 싶다고 말하는 병운에게 20만 원은 나중에 갚으라고 말하는 희수는 그 둘 사이에 무엇을 남겨놓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길가에 병운을 내려주고 멀리서 그를 바라보는 희수는 알듯 말듯한 엷은 미소를 지으며 제 갈길을 간다.


2008년 개봉한 이 영화를 분명 봤던 기억이 있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나는 뭐 이런 거지 같은 영화가 있나 하며 영화관을 나섰다. 캐릭터에 공감하지 못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어렸던 탓에 배우들의 감정선을 읽어낼 줄 몰랐고, 특별한 사건 없이 진행되는 영화의 흐름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탓이다. 환한 아침을 배경으로 시작했던 영화는 캄캄한 밤을 배경으로 마무리된다. 두 시간 남짓한 시간이지만 두 사람의 하루를 찬찬히 따라다니다 보니 정말 하루가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미움도 미련도 후회도, 그 어떤 감정의 찌꺼기도 남기지 않고 오롯이 서로를 진심으로 응원하게 된 두 사람의 모습이 아름답다. 밤이 가장 밤다워 보였고, 진짜 저녁의 공기가 느껴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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