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물끄러미 책장을 살펴본다. 우리나라에서 노벨문학상이라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밈이건 지적 허영이건, 문학과 책이 대중의 관심을 받아 수면 위로 떠오르는 분위기가 무척이나 반갑다. 인디밴드를 좋아하다가 그들이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되면 나만 알고 싶은 마음에 기존 팬들이 등을 돌리는 현상도 있다던데, 취미의 영역에서 어찌 보면 소수에 위치하고 있던 독서가, 그중에서도 문학이 대중성을 띄려 하는 모습 앞에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등을 돌리기보다 극진한 환대의 마음을 품는다. 한강 작가의 작품 가운데 내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은 소년이 온다 한 권뿐이었다. 몇 년 전 같은 학교에 근무했던 인연이 지금껏 이어져온 모임에서 이번에는 채식주의자를 읽어보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한강 품귀 현상에 도서관에서도 서점에서도 채식주의자를 찾을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올해 동학년을 하고 있는 선생님 중 한 분이 집에 채식주의자가 있다며 선뜻 빌려주겠다고 한다. 책을 읽는 사람이 희귀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주변에 책을 사랑하고 독서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있음에 감사하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국내 작가의 책이라 생각하니 새삼 경건해지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반쯤은 들뜨고 반쯤은 걱정되는 마음을 품고 첫 페이지를 넘긴다.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9p
그녀는 내가 고르고 고른, 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가 아니었던가. 26p
채식주의자는 세 명의 등장인물을 각각 주인공으로 내세워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연작소설이다. 평범한 인물이었다가 채식주의자가 되어 종국에는 식물 그 자체가 되어버리려는 인물인 영혜, 영혜의 형부, 그리고 영혜의 언니. 세 사람을 통해 예술, 채식, 금기, 평범, 비범, 가족 등의 이야기를 엮는다. 채식주의를 고집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련의 시선이 있다. 고집스럽고 예민한 사람, 섬세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 하지만 작가는 말한다.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하고 섬세함을 지닌 특별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채식주의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채식주의에 빠지는 것이라고, 그러므로 이것은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예외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주목해야 하는 이야기라고, 작가는 그렇게 소수의 이야기를 일반론으로 끄집어내려는 과감한 시도를 실행한다.
점점 사람들은 아내가 그 모임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대화를 이어갔다. 나만은 가엾게 여긴 듯 가끔 무언가를 물어오는 이들이 있었으나, 내심 나조차 한 묶음으로 경원시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33p
채식주의로 상징되는 어떤 비주류, 비정상성의 이야기가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작가의 바람과 달리 현실에서 보편의 범주를 벗어나는 모든 행위와 행위자는 외부인이자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 그들은 배척되며 그것은 고립을 의미한다. 자본을 위해, 권세를 위해, 정서적 안정을 위해. 어떠한 형태의 이득이건 인류가 이득을 얻어내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방법은 무리 속에 스며드는 것이다. 인간은 정말로 사회적인 존재인가. 사회적 존재라는 말이 인간의 태생적 본능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남기 위한 협력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필요하지 않다면, 나에게 어떠한 위협이나 손실도 발생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과연 진심을 다해, 진정성 있는 관계를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일까. 이방인들은 그러한 것들을 과감히 스스로 거부하곤 하는데 그런 태도는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본인을 고립시킨다. 하지만 이방인에게 고립 따위는 애초에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설 채식주의자의 첫 번째 이야기의 화자인 영혜의 남편은 아내에게 염오감을 넘어 점점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어쩌면 가장 일반적인 인물인 영혜의 남편을 통해 작가는 비정상과 비주류에 대한 일반적인 정서를 환기시키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정상과 비정상을 조금씩 나눠가진 채 살아간다. 하지만 세계가 굳게 쌓아놓은 보편이라는 장벽을 넘어서지 못하는, 그리고 그것이 금기를 건드리는 종류의 비정상이 내 안에 있을 때, 인간은 필연적으로 파멸에 한발 다가서게 된다. 이해가 될 듯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이해가 안 되면서도 이해가 될 것 같은 그 기묘한 경계선을 넘나들며 소설 채식주의자를 읽어냈다. 마지막 장면에서 영혜가 보여준 기묘한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는 문득 구역질이 났는데, 그 이미지들에 대한 미움과 환멸과 고통을 느꼈던 동시에 그 감정들의 밑바닥을 직시해 내기 위해 밤낮으로 씨름했던 작업의 순간들이 일종의 폭력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83p
두 번째 이야기 몽고반점의 화자 영혜의 형부는 예술에 사로잡혔다. 예술이란 무엇일까. 예술을 추종할 수밖에 없는 예술가란 어떤 사람일까. 기존의 도덕관념과 예술혼이 충돌할 때 예술가는 무엇을 느끼는가. 한 번 떠오른 작품을 완결 짓지 못하면 그것이 작품이건 인생이건 결코 그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예술가의 습성, 그것은 어쩌면 가장 예민한 부류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지점일까. 인간은 자신이 물러난 지점에 그대로 멈춰 서게 된다. 때로는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기도 한다. 그것은 실패로 각인되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물러나면 다른 어떤 것도 생성할 수 없다는 것을, 다른 어떤 것에도 몰입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가 처제의 몽고반점에 홀린 듯 매료된 이유는 그것이 순수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순수하다는 것은 티 없이 맑고 깨끗하고 고결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군더더기 없는 것, 살이 붙지 않은 것,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태초의 어떤 것을 뜻한다. 미술가들이 점점 추상의 세계에 빠져들고, 음악가들이 어떤 한 음정에서 온 세상을 들여다보듯, 예술가들은 가장 정제되고 가장 단순한 어떤 아름다움에 취한다. 예술가들이 각자 추종하는 어떤 태초의 "미", 그 미적 요소가 그를 흥분시킨 셈이다. 예술가의 순수한 영혼, 속세의 거짓된 이미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구토감을 느낄 만큼 연약하고 순수한 그는 어린아이들만 가지고 있는 몽고반점을 지니고 있다는 처제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녀를 황홀경의 대상으로 느낀다. 그것은 순수와 이상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본능에 따른 예견된 결과였을지도 모르겠다. 작가 한강은 예술가들의 순수성에 대한 집착을 이렇게 표현한 것은 아닐까. 무엇이 맞고 틀린 것인지,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은 늘 혼란을 품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가 정말 놀란 것은, 그녀가 발가벗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기가 전혀 묻어 있지 않은 알몸으로, 자신도 조금 놀란 듯 그녀는 멍하게 서 있었다. 그러더니 주섬주섬 바닥에 널린 옷가지를 끌어다 자신의 몸을 가렸다. 부끄럽거나 당황해서가 아니라, 으레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해야 하니까,라는 듯 담담한 태도였다. 90p
한강 작가는 영혜를 어린아이처럼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어떤 순수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최대한 말을 줄이고 행동 역시 무언가 잘 모르는 듯한 태도, 많은 것들이 생략된 듯 묘사한다. 예술은 규범, 도덕, 일상, 보편의 장벽을 넘어서려 끝없이 시도한다. 새롭고 낯선 것, 그것은 기존 질서의 파괴를 통해서 도달할 수 있기에 그렇다. 늘 그러하듯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 사이에서 예술이냐 외설이냐를 두고 치러지는 설전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예술가의 숙명이다.
남편은 저렇게 날개가 있는 것들을 즐겨 찍었다. - 중략 - 저 장면은 왜 들어간 거예요,라고 그녀는 물은 적이 있었다. 무너진 다리와 장례식의 오열장면 끝에 느닷없이 새의 검은 그림자가 2초쯤 천천히 허공으로 솟아올랐을 때였다. 그냥, 이라고 그는 그때 대답했다. 그냥 저런 걸 넣게 돼. 넣고 나면 마음이 편해져. 160p
결혼 전에 그는 말한 적이 있었다. 당신의 선량함, 안정감, 침착함, 살아간다는 게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아 보이는 태도... 그런 게 감동을 줘. 161p
인혜의 남편은 우울한 기질의 사람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삶 자체가 고된 사람, 날아가는 것을 동경하는 사람, 무너진 다리나 장례식의 오열장면 같은 것에 본능적으로 끌리는 사람, 행복보다는 불행에 다가서려는 사람, 그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끝내 실패하고야 말지만 그는 몽고반점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이 즐겨 찍던 대상의 이미지를 자신에게 덧씌우려는 시도를 한다.
이층과 삼층에 배치된 병실의 창들은 철창살로 막혀 있다.
짙은 회색의 콘크리트 벽면은 비에 젖은 탓에 평소보다 어둡고 육중해 보인다.
맑은 날에는 그 사이로 얼굴을 내민 환자를 보기 어렵지만, 이런 날씨에는 비를 구경하는 환자들의 회색 얼굴이 여럿 보인다.
인상 깊은 문장이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할 수준의 작가에게 예리하다는 표현은 참으로 무딘 찬사에 불과할 테지만 그럼에도 그런 표현을 쓸 수밖에 없음은 그녀의 예리함을 달리 표현해 낼 예리함이 나에겐 없는 탓이다. 특히 그녀는 어둠의 단면을 잘라내 이미지화하는 것에 매우 능해 보인다. 그녀는 정신병원이나 교도소 같은 육중한 비극의 공간을 실제로 여러 번 마주한 적이 있거나 아주 낮고 짙게 깔린 고독의 냄새를 어디서든 기어코 맡아내고야 마는 기민한 후각이 발달한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고래고래 악쓰는 여자의 화려한 꽃무늬 모자를 바라다본다. 이제는 저쯤의 미친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진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 병원에 자주 드나들게 된 뒤, 그녀에게는 가끔 정상적인 인간들로 가득 찬 평온한 거리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진다. 172p
어쩌면 살아간다는 것은 감각을 점점 무디게 만들어가는 과정은 아닐까. 먹던 것을 계속 먹어 미각이 무뎌지고, 본 것을 계속 바라보며 시각적 아름다움에 무뎌지듯이 정서적, 감각적, 지적 예리함 같은 것들이 비슷한 중량의 반복적 자극에 의해 무뎌지는 것. 또는 정 반대로 인생에서 그러한 자극이 완벽히 소실된 탓에 무뎌지는 것. 우리는 너무 많이 느끼거나 혹은 아예 느끼지 못하게 되면서 세상과 삶에 서서히 무감각해진다. 인혜는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로만 생각해 보면 명백한 피해자다. 남편과 여동생의 이해 못 할 외도, 미쳐가는 동생을 간병하며 느끼는 기묘하게 꼬여있는 감정, 폭압적인 아버지에게 억눌려 자신을 감추며 살아가는 방식에 관성이 붙어 결국은 자신의 삶이 존재하기나 했던 것인지 헷갈릴 지경에 이르는 삶. 인혜는 불행한 인물이며 동시에 현대인들의 그늘진 삶을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영혜가 거꾸로 서서 온몸을 활짝 펼쳤을 때, 그 애의 영혼에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하지만 뭐야. 넌 죽어가고 있잖아. 사실은 죽어가고 있잖아. 그것뿐이잖아. 그녀는 입술을 악문다. 피가 비칠 만큼 이의 힘이 세어진다. 영혜의 무감각한 얼굴을 움켜쥐고 싶은 충동을, 허깨비 같은 몸뚱이를 세차게 흔들고, 패대기치고 싶은 충동을 그녀는 억누른다. 206p
영혜는 예인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예술가의 삶은커녕 평범한 삶에조차 도달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과 다른 삶, 예술가적 삶을 살아가는 인혜를 바라보며 흔들고 패대기치고 목을 졸라 죽이고 싶을 지경이다. 미쳐가는 동생을 가족이라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지켜봐야만 하는 가족애의 이면에는 나와 다른 것, 평범함을 넘어서는 어떤 이해 못 할 것들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본능이 녹아 있다.
감상과 별개로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염오감, 광휘, 교교하다, 박명, 서름서름하다, 후락한, 낙착되다, 흘레붙다, 더께, 담지하다 같은 단어들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 특히 염오감은 설마 대가의 작품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오타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생전 처음 마주하는 낯선 단어였던 탓에 한편으로는 이거 정말 오타인가? 싶은 생각이 동시에 들어 적잖이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소설이 됐건 영화가 됐건 대가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에게는 소재가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채식주의자라는 소재를 통해 다양한 이야기를 토해내듯, 작가의 필력과 통찰이 상상력과 소재를 매끄럽게 연결해 낼 때 어떤 이야기든 가능해진다는 생각이 든다. 모래알 한 알로 우주의 법칙을 이야기할 수도 있고 대제국의 몰락을 통해 한 가족의 가정사를 이야기할 수도 있는 것이 작가의 역량이다. 무엇이든 말할 수 있고 무엇으로든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곧 작가의 힘이며 이야기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