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나는 물 같은 사람이었다.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했었다.
재미있는 사람과 어울릴 때면 그 사람 못지않게 텐션이 올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어댔다. 진지한 사람과 마주할 때면 개똥철학일지언정 최선을 다해 나의 진지함도 그에 못지않다는 듯, 알고 있는 온갖 정보를 얼기설기 엮어 그의 진지함을 흘리지 않으려 했다. 공감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적당히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며 공감을 토대로 친해졌고, 팩트를 따지길 좋아하는 사람과는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팩트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모임에서 당신은 어떤 사람인 것 같냐는 질문에 나는 나 스스로를 물 같은 사람이라고 정의 내렸다. 누구를 만나도 잘 어울리고, 비슷한 결을 내비칠 수 있으며, 무리하게 흐름을 깨뜨리지 않고, 적당히 분위기를 맞출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내가 인식하고 있는 2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에 걸쳐있는 나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것을 "유연함"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정의는 꽤 그럴듯해 보여 적당히 마음에 들기까지 했다.
이제와 생각하니 그것은 내가 물처럼 유연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어긋남과 이질감을 견디지 못할 정도로 약하디 약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는 조화로운 어울림이라기보다 나의 내면을 깎아서 주변에 맞추고 있었을 뿐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나의 본모습을 드러내면 사랑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지내다 보니 이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끔 누군가가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듯 이야기를 할 때면 그것이 반갑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다. 가까운 사람인 경우에는 그렇게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반갑고, 가깝지 않은 사람인 경우에는 나도 모르는 것을 어찌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의아한 마음이 들어 우습다.
캐릭터가 강한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을 만나도 어떤 환경에 놓여도 그 고유의 색을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들. 어린 시절에도 그런 사람들을 멋지다고 생각했었지만, 나이를 먹으니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마음의 크기로 그들이 더욱 멋져 보인다. 꿀물과 맹물은 각각 그 고유의 달콤함과 시원함이 있지만 어설픈 비율로 섞었다가는 꿀물도 맹물도 아닌 애매한 맛이 돼버린다. 지금 내가 바라보는 나의 모습 또한 세월이 흐른 뒤에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전에는 맞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틀린 것이었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제대로 본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정답은 때에 따라, 사람에 따라, 시기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때 내 모습이 지금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그때의 삶을 부정하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금 내 모습 또한 훗날 어느 시점에 이르러 돌아본다면 부끄러워 지우고 싶은 흑역사가 되어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사진을 보며 피사체의 표정과 동작과 배경에만 집중하는 사람이 있고 사진을 찍어준 사람의 표정과 마음을 헤아리려 하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현상만을 바라보는 사람이고 후자는 현상 너머 그 이면과 또 다른 어떤 본질적인 것을 바라보려는 사람이다. 아이의 자전거 타는 모습, 연인이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사람이 얼마나 애정 어린 눈으로 그 순간을 응시하고 있었을지 헤아릴 수 있게 되는 것. 우리는 그때 비로소 제대로 볼 줄 알게 된다.
스님의 초상화를 진영이라고 한다. 그런데 진영은 스님이 살아있을 때 그리지 않고 돌아가신 뒤에 그린다고 한다. 이유인 즉 살아생전의 변동은 그를 증거 할 수 없으니 그의 삶과 내면의 변동이 종결된 죽음 이후에 그의 외적 내적 발자취를 종합하여 한 인간의 본질을 그려내기 위함이라고 한다. 멋지지 않은가. 죽을 때까지 인간이라는 존재는 끝없이 변모하고 우리는 그토록 변화하는 한 인간을 제대로 알 수 없으니 변화가 종결된 사망 후에야 종합적으로 그를 판단하겠다는 그 생각이 아름답다.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려는 노력, 변화하는 모든 것을 종합하려는 노력, 그것이 삶의 끝에 이르러서야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의 문제라고 한다면 순간의 부끄러움에 매몰되지 말고 그저 또 다른 변화의 가능성을 그리며 묵묵히 현재를 살아내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