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옵티콘은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는 뜻의 'opticon'이 합성된 용어로,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교도소의 형태이다. 교도소 한가운데에서 감시자들은 외곽에 감금된 죄수들을 감시할 수 있으나 감시자들이 위치한 중심은 어둡게 되어 있어 죄수들은 감시자들의 존재 여부조차 확인할 수 없게 설계되어 있다. 시야 확보에 따른 권력 구조를 이토록 적나라하게 표출한 다른 발명품이 또 있을까.
그러니까 남들보다 더 많이 볼 수 있고, 더 멀리 볼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힘을 가진 셈이다. 획득하는 정보량의 많고 적음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잉태하는 어떤 무형의 힘에 의해 그것은 일종의 아우라를 빚어내고 시야 확보에 실패한 사람들은 주눅이 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은 필연적으로 자본과 연동된다. 그래서 높은 시야, 깨끗한 시야, 먼 곳까지 보이는 시야를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 여기저기에서 발생한다. 한강을 사이에 둔 강남, 강북의 스카이라인을 책임지는 아파트들은 너도나도 앞다투어 한강이 얼마나 잘 보이는지를 강조하고 한강이 보이지 않으면 국회의사당이 보인다거나 롯데타워가 보인다는 등 또 다른 자본적, 혹은 권력적 가치를 지닌 어떤 대상을 볼 수 있음을 강조한다. 통창 카페가 유행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고 아파트의 창살 역시 사라지는 추세다.
나만 보고 너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은 판옵티콘의 사례처럼 강력한 힘과 권위를 획득하였음을 상징하는데 이런 권력구조를 형성하기 위해 인간은 다양한 노력을 끊임없이 시도해 왔다. 사극에서 왕과 신하들이 회의를 진행할 때 신하들은 결코 왕과 마주 보고 서 있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며 왕의 시선을 직관적으로 인식할 수 없어서 끊임없이 곁눈질로 왕의 의중을 살펴야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왕은 자리에 앉아서 신하들을 한 번에 아우르며 그들의 곁눈질, 고갯짓, 움직임 등을 한 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높은 단상 위에 앉아서 그들을 지켜본다.
시야 확보를 통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은 이런 상징성 있는 상황들을 통해서만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분초를 다투는 위급한 순간에 오히려 적의 시야를 빼앗는 것이 승리를 위해 가장 우선시 되는 임무일 때가 많다. 연막탄이나 섬광탄을 통해 적의 시야를 빼앗거나 적의 정찰병이 아군의 진영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것은 전투 시 가장 중요한 상황임을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라고 할지라도 이미 다양한 게임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득한 바 있다. 실제로 6.25 전쟁 때 밤에 도망 다니다가 군인을 만나면 군인들이 눈앞에 횃불을 빠르게 가져다 대며 "남이냐 북이냐"라고 묻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시야를 잃어버리는 일은 그야말로 즉각적인 정보의 차단을 발생시켜 목숨을 위태롭게 한다. 새벽 5시, 조명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 지방 고속도로에서 폭설을 뚫고 운전했던 적이 있다. 눈이 와봐야 얼마나 오겠냐며 와이퍼로 유리창을 닦으면서 가면 그만일 것이라 생각했던 내 예상과 달리 마치 우주에서 수많은 소행성을 뚫고 나아가는 우주선에 탑승한 듯한 착각과 함께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상황 속에서 운전을 하며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치명적으로 위협적인 일이라는 것을 체감한 적이 있다.
안구를 통해 물리적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넘어 과학적, 사상적, 철학적으로 깊은 사고를 통해 특출 난 비전을 보유하게 된 사람들은 선도적 인물로서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보다 자유롭고 큰 힘을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인간은 보기 위한 경쟁과 사투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하지만 사랑과 우정은 "볼 수 있다"는 기능적 영역을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로 치환시킨다. 더 많이, 더 멀리 볼 수 있는 것이 힘의 세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과 우정 앞에서 그 효율적이고 강력한 도구를 얼마든지 내려놓게 수 있게 된다.
사랑이 눈이 머는 거라면 우정은 눈을 감아주는 것이다.
사랑은 눈이 머는 것이고 우정은 눈을 감아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랑은 애초에 눈이 멀어버려 볼 수 없게 되는 것이고 우정은 볼 수 있음에도 못 본 척해준다는 뜻인데, 생각해 보니 꽤 그럴듯한 문장처럼 느껴진다.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존재로 인해 눈이 멀어버리는 것, 이것은 일종의 마비 상태에 가깝다. 기능적으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시야"는 많은 가능성과 위험성을 파악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것이 어쩌면 가장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사랑의 힘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사랑에 빠지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명백하다. 사리판단을 하지 못하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우정은 이와 약간 결을 달리한다. 분명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고 "시야"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의지로 기꺼이 친구를 둘러싸고 있는 부정적, 문제적 상황들에 대해 함구하겠다는 지지의 표명인 것이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일, 도저히 계산이 안 나오는 일,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없는 일, 가성비가 안 나오는 일, 말도 안 되는 품이 드는 일, 회수 가능성을 따지지 않고 마음과 돈과 시간을 쓰는 일, 그런 것이 아마 사랑이고 우정일테다. 무엇에 눈이 멀어 봤는가, 그것이 당신이 사랑한 대상일 것이다. 어디까지 눈을 감아 봤는가, 그것은 당신이 벗으로 여기고자 하는 존재에 대해 발휘할 수 있는 마음의 최대 크기일 것이다.
살다 보면 사랑과 우정에 목숨을 걸던 시절도 있었을 테고, 사랑과 우정이 덧없고 의미 없게 느껴지는 시절도 있을 테다. 무엇보다 가치로운 것 같기도 하다가 무엇보다 가치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사랑과 우정이라는 테마는 인간의 삶과 뗄 수 없는 영속적인 주제임이 분명하다. 어떤 화두에 대해 깊이 시선을 던지던 시절이 있는가 하면 이토록 무심하게 시선을 두지 않고 살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무관심한 시절도 있기 마련이다. 시간은 나에게 시절 인연이 있듯이 시절 화두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느리지만 확실하게 전달하려는 모양이다. 그런 것들을 보고 느끼고 집중하다 보면 또 무언가를 깨닫고, 바뀌고, 공고해지는 과정 속에서 나의 삶을 조각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의 생을 통틀어 내가 쏟아부어야 할 전부라는 것을 이제는 명확히 안다. 진심으로 기쁜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