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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상하농원

동화 속에 온 듯한 착각

by 정 호

민들레 꽃씨가 잔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허공을 맴돌다 눈 내리듯 초록의 잔디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잠시 흩날리다 사그라드는 것이 아니라 꽤 오랜 시간 같은 장소에서 흩날리고 있는 민들레 꽃씨를 바라보고 있자니 비염 때문에 충혈되는 눈과 꽉 막혀가는 비강의 고통스러운 비명을 외면하고 싶을 만큼 아름답고 고결한 어떤 찰나의 순간을 마주한 듯한 기분이 든다.


탁 트인 농원을 마주 보며 잠시 멈추어 선다. 한편에는 상추, 감자, 열무 등이 심 기워져 푸릇한 싹을 틔우고 있다. 은은한 따듯함을 쏟아붓는 햇빛은 통나무를 절반으로 잘라 눕혀놓은 듯 보이는 의자의 표면을 적당히 따듯하게 달군다. 가만히 의자에 앉아서 엉덩이에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고 있으니 몸속 깊은 곳에 오래부터 자리 잡은 균을 살균하는 듯, 마치 무언가가 치유되는 기분마저 든다. 반듯하고 길게 늘어선 텃밭을 중심으로 양 옆으로는 동화 속에 나올법한 건물들이 몇 채 줄지어 있다. 딸기 수확 체험, 소시지 만들기 체험, 치즈 만들기 체험,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각종 체험장을 건물 안에 만들어 놓은 듯하다. 건물의 틈새 사이로 아이의 손을 잡은 부모들이 들락거린다. 아이에게 다양하고 따듯한 경험을 선물하고자 부모들은 주말마다 바쁘다. 특히 요즘처럼 날이 풀리는 봄이면 어딜 가도 아이의 손을 잡고 만면에 웃음을 띤 부모들을 쉽게 마주할 수 있다. 아내와 아이는 소시지 만들기 체험을 하러 어느 한 귀퉁이의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입장할 때 받은 식혜 음료를 들고 호수가 보이는 그늘로 발걸음을 옮긴다. 따사로운 햇빛이 내리쬐던 양지의 온기와 달리 호숫가 그늘은 약간 찬 기운을 느낄 정도의 기분 좋은 서늘함을 풍긴다. 벤치에 앉아 식혜를 한 모금 마시며 달지 않은 그 맛에 또 한 번 기분이 좋아진다. 지저귀는 새소리와 찰랑거리는 호수의 물결소리, 스피커를 통해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이름 모를 피아노 연주곡에 귀를 기울이며 잠시 눈을 감는다. 그 적막한 고요와, 고요를 채우는 은은한 자연의 소리,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다시 한 모금 마셔도 여전히 만족스러운 한 모금의 식혜는 고요의 시간이면 늘 찾게 되는 휴대폰을 떠올리지 못하게 할 정도로 완벽한 평화와 행복의 시간을 선물한다.


소시지 만들기 체험이 끝나자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식사를 하기 위해 식구들은 분주히 식당 쪽으로 향한다. 한식당 하나, 양식당 하나, 카페가 하나, 규모에 어울리는 적당한 식당가는 선택의 소란스러움을 줄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차분히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며 객들을 기다린다. 한식당에 들어가 삼겹살과 김치찌개를 주문한다. 보글보글 끓여 나온 시큼한 김치찌개와 맛있는 돼지고기에서 나는 특유의 기름진 고소함을 만끽하며 기분 좋은 점심 식사를 마친다. 아내는 생맥주를 한잔 들이켜고 먼저 식사를 마친 나는 아이와 함께 식당 밖 바베큐장으로 나간다. 회백색의 자갈로 뒤덮인 땅을 바라보며 아이는 곤충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개미와, 땅강아지와 바퀴벌레인지 쇠똥구리인지 이름 모를 곤충들을 바라보며 아이는 신기하다는 듯 눈을 떼지 못한다. 발로 밟아 죽이지 않고, 손으로 잡아 던지지 않고, 그저 가만히 두 눈으로 그들의 존재를 들여다보며 곤충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아이의 모습에서 한 조각의 평화를 본다.


딸기 따기 체험을 할까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내 친구 부부 내외가 온다는 소식에 딸기 체험을 잠시 미루기로 한다. 아내는 친구를 만나자 학창 시절 10대 소녀로 돌아간 듯 깔깔대며 웃는다. 이야기를 나누며 정신없이 웃다가도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가 걱정돼 아이들이 놀고 있는 놀이터를 향해 쉴 틈 없이 눈을 돌리는 아내와 나는 어쩔 수 없는 부모가 되었다는 것을 느끼며 주위에 있는 다른 부모들을 본다. 아이들의 천국인지, 아이와 함께 놀러 갈 곳을 찾아 헤매는 부모들의 천국인지 헷갈릴 정도로 주변이 온통 가족 여행객들로 가득 찬 공간 안에 앉아있으니 시절마다 발걸음이 닿는 장소가 변해감을 새삼 느낀다. 그렇게 온종일 따듯하고 선선하고 행복이 가득한 시간을 보내고 나니 그 장소에 대한 애착이 생기기라도 하려는 듯, 그저 모든 것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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