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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다정하고 촌스러운 밥상
<시어머니의 촌스러운 가정식>과 거의 흡사한 맛에 깜놀
by
선홍
Dec 29. 2024
<할머니 두부집>
영하의 기온으로 팍팍 내려가는 최근의 추운 겨울밤이었습니다.
볼일이 있어 남편, 아들과 평창동에 갔다가 날은 어두워지는데 배는 고프고, 하이에나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식당을 찾았습니다. 배 고프면 눈에 뵈는 게 없는 인간입니다. 그렇다고 또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질 않아요.
뭔가 모를 맛집의 스멜이 풍겨지는 곳, 노포지만 지저분하지 않은 곳을 선호합니다.
식당이 많지도 않은 동네에서 온몸을 덜덜 떨어대면서 초스피드로 맛집레이더를 풀가동했습니다. 이럴 때 핸드폰의 손쉬운 검색 기능이 있지만서도 본능적으로 찾아냈을 때의 엄청난 희열이 있단 말입니다.
전국의 먹순이, 먹돌이들은 아시죠?
그때 남편이 '지극히 평범한' 건물의 2층에 있는 식당을 발견했습니다. 메뉴도 김치, 두부 같은 '지극히 평범한'것들이었죠.
그 평범함에 뒷걸음질 치다가 너무 추워서 그냥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 잘 찾은 것 같다는 예감이 팍 들었습니다.
낡고 오래되어 박물관에나 있을 것 같은, 희한한 의자가 놓인 건물 입구가 역사를 말해 줬지요.
이런 의자가 놓인 옛날 빌딩에 있는 음식점이라면 분명 맛있을 거야, 생각했어요.
해가 진 이른 겨울 저녁, 식당 안에 들어가니 손님이 우리뿐이라 다시 한번 주춤했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순 없다는 생각에 그냥 눌러앉았죠.
오래되어도 깨끗한 식당을 운영하시는 나이 드신 할머니와 아주머니뿐이었는데, 밑반찬이 나온 순간 깨달았습니다.
여기 내 스타일이라고.
평범한 감자조림, 콩나물무침, 콩자반 같은 것들뿐인데 하나같이 정갈하고 맛있는 겁니다.
반찬 한두 개 정도는 좀 말랐거나 신선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모든 반찬이 짜지 않고 리필을 부르는 맛이었죠.
메인으로 나온 뚝배기에 담긴 두부찌개 또한 칼칼하고 얼큰해 금방 몸에 온기가 돌았습니다. 직접 만든 두부로 보이는 두부와 고기 건더기를 밥에 부어 삭삭 긁어먹었더니 남편이 놀라는 겁니다.
밥을 항상 남기고 반찬으로 배 채우는 제가 개눈 감추듯 한 것이죠. 평소 저보다 많이 먹는 남편과 아들을 가볍게 제쳐버린 후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평범한 음식을 왜 맛있게 먹었을까?
배가 많이 고파서 그렇지 뭐, 하고 넘기려다 깨달았습니다. 아주 편하고 익숙한 맛인데 혀에 좍좍 달라붙었던 이유는 바로... 시어머니의 음식맛과 유사했던 겁니다!
결혼초엔 초라하고 낯설어서 맛있는 걸 몰랐다가 이젠 길들여진 것인지, 인생맛을 알게 되어 그런 것인지 혀에 달라붙고 만 시어머니의 음식맛.
그걸 먹고 자란 아들보다 더 맛있게 먹은 절 발견하고 충격에 빠졌습니다.
결혼한 지 어느덧 이십 년, 저도 나름 인생의 고비가 많았습니다.
시어머니 때문에 이혼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고, 시어머니 덕분에 다시 살아보자 생각한 적도 많았습니다.
남이 나한테 왜 저러지? 생각했던 시간을 지나
혀로,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되기까지 그 중심에 시어머니의 소박한 가정식이. 밥상이 있었던 셈입니다.
그걸 낯선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문득 깨달았죠.
낡고 흔해빠져 가치가 없어 보이는 사물, 사람 속에 진리가 숨어있음을,
주제에
부처님 같은 소릴 해보는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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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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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계에서 기획 PD 로 오랫동안 활동했습니다. 퇴사 후 글짓고 밥짓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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