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12년이 되었습니다. 원하는 장르의 작가로 성공하지 못한 세월이.
요즘처럼 급변하는 세상 속에 글에 대한 순정을 품고 지고지순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것도 짝사랑을, 나이도 40대에 접어들었을 때 시작했었다면.
단박에 미쳤다는 소리가 나오겠죠. 특히 내가 아끼는 가족이나 친구라면 더더욱.
네, 그런 사람이 실재합니다. 개화기, 일제 강점기 때 사람 아닙니다. 저도 제가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한 놈에게 순정을 품게 될 줄은 몰랐죠.
영화사에서 기획 PD로 분초를 다투며 살다가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을 땐 길면 2,3년 만에 기가 막힌 시나리오를 써낼 줄 알았어요.
솔직히 그것도 길다, 한국 영화계를 뒤흔들 충격적인 작품, 첫 작품부터 작품성과 흥행성을 고루 갖춘 시나리오를 써버려 동료들을 경악시켜 버릴 상상에 웃음이 절로 비질비질 새어 나왔죠.
유명 제작자, 감독들에게 번호표 나눠 줄 생각에 안 먹어도 배부른, 뇌에 이상이 생겨버린 상태가 됐습니다.
시나리오는 소설, 드라마와 달리 감독의 예술이라 제작자나 감독과 협의 한 후 계속 고치는 게 일입니다. 그러니 한 작품에 몇 년 걸리는 건 예사, 만일 시나리오 작가의 오리지널 작품을 쓰고 있다면 더욱 오래 걸릴 각오를 해야 하죠.
시나리오란 결국 글로 남을 설득하는 작업이기에 힘 있는 제작자, 감독이라면 설득하는 일이 좀 더 쉬운 게 현실입니다.
그런데 저는 누구보다 그 현실을 잘 알면서도 오리지널 작품만 썼습니다. 내가 만든 세상에서 신나게 놀아보고 싶었거든요.
남의 작품 고치는 일이 그럼 더 수월하냐? 아니죠. 그걸 잘하려면 작품을 제대로 읽는 눈과 병의 원인을 제대로 짚어내는 명의의 기술이 있어야 하거든요.
아니 그렇게 불확실하고 골치 아픈 일을 왜 하냐?라고 물으시겠지만 세상에 만만한 일이 어딨습니까.
사실 어려우니까 더 끌리는 법이죠, 나쁜 남자처럼.
정리해 보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첫 번째 원인이 자명해 보입니다.
거의 40대가 된 늦은 나이에 도전+ 신인인데 오리지널 시나리오만 씀.
나이 문제는 앞으로 120세 시대라는데 도전하기 좋은 나이라고 좀 쳐주십시다. 늦은 건 사실이지만 그 이유로 실패하진 않는다고 생각해요.
자, 이제부터 가장 중요한 두 번째 실패원인이 나옵니다. 참을성 없는 분은 오늘 엑기스 놓치시는 겁니다?
저의 가장 큰 문제는 '주제파악'을 못했다는 겁니다. 반대로 말해 주제파악을 잘하면 성공한다는 소리겠죠.
당연한 소릴 왜 하고 자빠졌냐, 실망한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은데요. 워워, 이건 진짜 중요한 문젭니다. 주제파악이 얼마나 어려운데요.
제가 뭘 잘하는지, 장점과 단점이 뭔지부터 생각하지 않았고, 오로지 쓰고 싶은 작품만 떠올렸습니다. 타오르는 순수한 창작열 그 자체 아닌가요?
써놓은 작품이 없으면 장단점 파악이 불가능하니 도전이 우선이란 말씀부터 드립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고민이다, 걱정이다, 하시는 분은 제 글에서 얻을 게 없을 겁니다.
죽고 죽이는 공포, 스릴러를 좋아했던 터라 일본, 북유럽, 미국 등 세계의 유명한 스릴러 작품들에 푹 빠져있었기에 당연히 그런 장르를 썼어요. 쓰는 동안에도 즐거웠습니다.
어느덧 이 정도면 덕업일치가 되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건만 스릴러 장르에 맞지 않다는 리뷰만 자꾸 듣게 됩니다. 밝고 따뜻한 게 잘 맞다고. 그럴수록 콧방귀를 뀌며 더 노력해야겠군, 하고 노트북 자판을 두들겨 팼습니다. 그랬더니 내 손가락과 노트북만 만신창이가 될 뿐 실력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어요.
세상이 내 노력을 알아주지 않으니 내 탓, 남편 탓, 조상 탓, 세상 탓을 하게 됐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전혀 행복하지 않았죠.
왜 심혈을 기울여 쓴 긴 글은 남이 알아주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쓴 짧은 글은 반응이 좋을까?
옆에서 보면 기가 막히겠죠. '바보야, 문제는 주제파악이야!'하고 합창하고 싶으시다고요?
남일이라고 그렇게 쉽게 말씀하는 거 아닙니다. 모두가 다 쿨하고 똑똑하다면 집착해서 생기는 온갖 문제들이 세상에 없었겠죠.
암튼 이미 제 말속에 답이 있었죠.
아무 생각 없이 순간의 영감을 재료로 짧은 글을 쓰는 게 좋겠다고. 소설도 단편소설을 썼을 때 반응이 더 확실했습니다.
그렇다면 짧은 단편이 모여 한 편의 긴 이야기가 되는 형식이 더 잘 맞겠네요? 이 글을 쓰면서 다시 깨달았으니 주제파악이 덜 끝났나 봅니다.
실패했던 마지막 세 번째 원인이 있습니다.
긴 글이 작품적으로 가치 있다는 편견과 함께 글을 돈으로 바꿀 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니 긴 글이 더 돈이 된다는 잘못된 생각을 했던 점이죠.
기획 PD를 했었기에 시나리오 작가료에 대해 잘 알았어요. 소설책을 내면 시나리오 작가료보다 1/10밖에 못 받고, 드라마작가보다 1/100밖에 못 받고... 하는 식으로 돈계산이 먼저 들어와 버린 거죠. 저만 쓰레긴가요?
창작자라면 쓰고 싶은 이야기가 먼저여야 합니다.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입니다마는, 내 안의 순수한 아이가 채 성장하기도 전에 돈 벌어오라고 강요한 셈이었죠.
아이는 자기가 공부를 잘하는지 춤을 잘 추는지 놀아볼 경험도 못한 채 내 눈치를 보느라 쪼그라들고 말았겠죠.
내 안의 순수한 영감을 잘 키워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는데, 내가 학대한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구에게나 꿈이 있습니다. 없어도 그만이고요.
하지만 꿈이 있다면 저처럼 어리석은 결정들을 하시지 않길 빕니다. 여러분이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길 빌며 이 글을 썼습니다.
건투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