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매거진
늦게 철든 반백살이라 다행이야
독감에 걸리면 그리운 '아.보.하'
by
선홍
Jan 12. 2025
푸딩을 먹다가
저는 큰돈이 들지 않는다면 유행하는 건 다 해보는 사람입니다. 올 겨울 유행하는 독감에도 걸리고 말았지요.
감기가 다 나은 딸과 오랜만에 즐거운 수다를 떨며 푸딩까지 나눠먹었는데, 딸에게서 옮은 겁니다.
올해 감기는 이상하게도 다 나은 것 같은데 재발하고, 전염성도 강하네요. 게다가 증상까지 심했어요.
의사 선생님에게 "감기 걸렸는데 두통, 근육통이 심하니 무슨 일일까요? 오한도 있고."라고 물으니 체온을 재셨습니다. 그랬더니 세상에, 열이 38도가 넘었습니다!
열이 많아 그런 것을 저는 의식도 못했어요. 눈뜨면 바쁘게 움직이는 일상을 살다 보니 열이 끓는 것도 몰랐던 겁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저에게도 근면성실한 코리안의 피가 흐르고 있었나 봅니다.
독감에 걸린 순간부터 갑자기 일상이 바뀌었습니다.
수면장애가 있나 싶을 정도로 길게 못 잤는데 며칠간 10시간을 넘게 잔 겁니다.
코가 막혀 후각이 둔해지자 예민함이 덜해졌어요. 평소 냄새에 예민해서 스트레스가 많았거든요.
입맛도 없어지니 아무거나 먹지 않고, 국물이 있는 부담 없는 음식만 조금씩 먹었어요.
신경안정제라도 먹은 사람처럼 뾰족하던 신경이 스르르 무너져 남편에게 잔소리할 힘도 없더라고요. 기침이 나와서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거든요.
평소 매일 보던 드라마들도 보기 싫어졌어요. 눈에서 뇌가 빠져나올 것처럼 머리가 아팠거든요.
당연히 카페에 가서 글도 쓸 수 없었죠.
감각이 다 차단된 채 사회와 단절된 기분을 느꼈습니다.
새해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자빠져버리나? 안달이 났습니다.
평소엔 눈뜨면 기상나팔이라도 누가 분 것처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는 유형인데, 몸에 무거운 추를 달아놓은 것처럼 일어날 수가 없는 거죠.
그렇다고 누워서 대단한 생각이라도 하나 치면 배고프다, 뭐가 먹고 싶네. 이런 생각만 하는 겁니다. 입맛도 없는 주제에 내 생존욕구가 얼마나 강한지 확인할 뿐이었습니다.
아까운 시간을 이렇게 죽이나 안달하다가 그 생각마저도 놓고 말았습니다. 생각하기도 힘드니까요.
그래, 이럴 때 쉬는 거지, 병원에 입원해야 쉴 수 있다는 사람의 경지까지 가고 싶진 않았습니다.
청력도 약해졌는지 목소리 큰 사람도 피해 다니고, 음악도 클래식만 낮게 틀었어요.
그러는 동안 깨달았습니다. 평소에 얼마나 많은 외부의 스트레스를 받고 살았으며 나 또한 남에게 주었는지요.
내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쓸데없는 말을 많이 했고, 냄새를 덮기 위해 불필요한 향을 많이 샀으며 도파민 중독으로 영상을 많이 봐 소중한 눈을 괴롭혔죠.
이런 것도 불교에서 말하는 '업'을 쌓는 행위 아닐까요?
그걸 깨달아야 한다고 감기가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또한 쉬어가도 괜찮다, 아무 일 안 생긴다고 말하는 것 같았죠.
남한테는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 잘한다 하면서 유독 자신에게만 혹독하게 굴었습니다. 다시 도전해야지,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거냐! 인정머리라곤 없는 마음속 조교가 항상 외쳐댔습니다.
때로는 마음속
조교의 입을 닥치게 해야 합니다. 감각의 셔터를 내리고, 격리될 시간도 필요합니다
.
그래야 잘 살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인생의 면역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빨리 나아서 '아. 보. 하(아주 보통의 하루)'를 되찾고 싶습니다. 깊고 진한 커피 향과 맛을 즐기고 싶어요.
마스크 꼭 쓰고 다니시고, 감기 조심하세요~
keyword
감기
독감
유행
27
댓글
2
댓글
2
댓글 더보기
브런치에 로그인하고 댓글을 입력해보세요!
선홍
가족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예술가
엄마 맘대로 어디 가노
저자
영화계에서 기획 PD 로 오랫동안 활동했습니다. 퇴사 후 글짓고 밥짓는 중입니다.
구독자
270
제안하기
구독
매거진의 이전글
고통이 없으면 우울해진다
오늘이 나의 가장 예쁜 날
매거진의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