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산책
일요일 상쾌한 아침 청량리역 근처에서 책을 한 권 산후 '투썸플레이스'에 앉아있습니다.
봄의 기온이 드디어 온몸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는 시기,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려요.
최근에 본 김창옥강사의 강연중 장례지도사가 출연했던 편을 인상 깊게 봐서 그런가 봅니다.
젊은 장례지도사 형제가 고충을 얘기하는데,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을 알면 손을 잡지 않으려고 한다고 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사실을 안 어머니가 고생하고 돌아온 아들들의 손을 꼭 잡아주신다고 해요.
우리는 유독 '죽음'이라는 단어를 꺼리고 언급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고통, 저승사자, 지옥, 종말 등등의 부정적 이미지부터 떠올라서 그런지 모르겠어요.
파리의 시내중심에 '페르 라페즈' 공동묘지가 있는 것과 달리 우리는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인적 드문 곳에 납골당이나 묘지가 있죠.
죽음을 쉬쉬하고 삶과 분리시켜 버리면 나에게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마치 한쪽 눈을 감고 사는 것처럼.
위에 언급했던 장례지도사도 말하더라고요.
사람들이 죽음이 자신만 피해 갈 것처럼 생각한다, 가족과 죽음에 관해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저 또한 죽음을 외면하고 살다가 크게 후회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친정엄마의 병이 점점 악화되던 시기였어요.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던 엄마와 그런 엄마를 잃고 싶지 않은 딸이 만나 병원에 입원할 일이 계속 늘어가는 상황에서도 죽음 후의 일을 서로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재수 없을까 봐, 죽음을 입에 담는 순간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 버릴까봐.
하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더라고요.
친정엄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장례방식과 엄마의 지인분들이 말하는 엄마가 원했다는 장례방식이 달라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종교문제라 서로 예민할 수밖에 없었는데, 엄마에게서 직접 들은 바가 없었던 저는 이쪽 편도 저쪽 편도 들지 못한 채 답답한 슬픔을 겪어야 했죠.
엄마와 죽음 후를 얘기하지 못한 걸 자책하고 후회했습니다.
죽음이 남에게만 오고, 나만 피해 갈 거라는 착각에 저 또한 빠졌던 것 같습니다.
그 일 이후 죽음을 자유롭게 언급할 수 있을 때 삶이 더 자유로워질 거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봄이 오기 직전의 시기,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아주 좋은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