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자주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고생 총량의 법칙'이 얼마나 정확한 법칙인가, 하는.
현명하신 조상님들은 법칙 따위 1도 몰라도 일찍이 다른 말로 표현하셨죠.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반대로 말하면 초년의 성공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성공해서 유명해진 사람들이 나락 가는 경우도 수두룩 봤죠.
영화사 신입시절이었습니다.
지금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한 감독들이 데뷔작, 또는 차기작을 만들기 위해 영화사 문턱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시기였죠.
저세상 개성을 자랑하는 감독님들과 대화하고, 그들을 관찰하는 일이 얼마나 재밌었는지 몰라요.
그중에 가장 눈에 띄지 않는 무개성의 감독이 계셨는데... 바로 봉준호 감독이었죠.
혈기왕성한 젊은 감독들은 등장하기만 해도 사무실이 요란해졌는데, 그분은 언제 왔다 갔는지 모를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써야 되니께)
어느새 <플란더스의 개>라는 데뷔작을 영화사에서 만드셨고요, 저는 그 영화가 재미없었습니다.
(흑, 죄송합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데뷔작의 흥행성적이 좋지 않은 신임감독에게 얼마나 살벌한 현실이 기다리는지 모르실 겁니다.
친해질 기회가 없어 잘 모르지만 절치부심, 이를 바득바득 가셨을 게 분명합니다.
감독 때려치우고 비디오대여점을 차릴까, 빵집을 차릴 까 고심하셨을 테고.
(감독들이 그 시절 망하면 비디오 대여점 차리지, 가 대세였습니다. 지금은 비디오대여점도 사라졌지만)
그런 후 3년쯤 지나 두둥, <살인의 추억>이라는 차기작을 내놓으셨죠. 감독님 캐릭터도, 작품도 인상적이지 못했기에 별 기대 없이 영화를 보러 갔어요.
다 보고 나왔을 땐 거대한 보신각종으로 머리를 세게 맞은 듯 멍해졌습니다. 대에에에에엥~
뭐야, 이렇게 인생작을 만난다고?!! 하는 느낌.
지금도 <살인의 추억>이 봉감독님이 만든 것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두 번째가 <기생충>이고요.
<살인의 추억> 또한 만드는 과정에서 흉흉한 소문이 많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진범이 잡히기 전이었기에 실화처럼 범인이 누군지도 모른 채 끝나버렸죠.
엔딩이 후련하지 않고 찝찝하네 상업적이지 않네 마네, 하면서 투자사에서 돈을 뺀다는 소문까지 돌았어요.
그때 만일 영화를 무사 개봉하지 못했다면 세계영화제를 싹 다 쓸어버리는 봉감독님이 존재하지 못했겠죠. 비디오대여점이나 빵집주인이 된 봉사장으로 만났겠습니다.
그다음 작품인 <괴물>또한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CG와의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죠.
그에 비하면 저는 순탄하게 진급을 하며 성장했습니다.
그 결과 혹독한 퇴사 이후의 삶이 기다리고 있었죠. 자칭 실패전문가 아닙니까.
지금은 세계적 감독으로 우뚝 선 봉감독님을 보며 '고생 총량의 법칙'을 실감합니다.
그러니 잘 된 사람 보면서 괜히 배 아파하지 맙시다. 그 사람들은 치러야 할 고생을 치렀으니까요.
역시 고생은 젊어서 하는 게 좋고,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감독님이 계속 승승장구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