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 하나를 키우면 다른 집 자식과 비교하고,
둘을 키우면 첫째 둘째를 비교하게 됩니다.
비교당해서 기분 좋았던 기억 아무도 없잖아요.
그래서 그런 말이 튀어나오려고 하면 속으로 헙! 스읍, 하고 삼켜왔습니다.
속으론 첫째는 저렇게 대인관계가 활발한데 둘째는 왜 방에만 있냐, 친구가 없냐 등등 걱정을 하죠.
솔직히 친구 좀 사귀라는 잔소리를 자주 하긴 합니다.
그 나이 때 아니면 순수하게 사람 사귈 시기가 없어서 걱정이거든요.
군대 가면 맡은 일을 제대로 할지 걱정이고, 여자와 대화라도 나눌 수 있는지, 평생 모솔이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의 공이 굴러 내려가 부피가 계속 커져요.
첫째가 대인관계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딸내미의 다양한 폭넓은 교우관계에 질려 왜 그리 싸돌아다니나 걱정합니다.
한 녀석은 좀 나갔으면 좋겠고, 다른 녀석은 좀 안 나갔으면 좋겠는데 중간이 없노! 속으로 외치면서.
그러다 걱정의 특징은 또 다른 걱정을 낳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걱정하고 잔소리한다고 애가 바뀌었을까요? 아뇨. 제 마음이 편안해질까요? 아닙니다.
생각을 바꿀 필요를 느낄 때 오은영 선생님 같은 카운슬러를 만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현실이 그렇지 않잖아요.
그럴 때 손쉬운 방법 중 하나가 제겐 독서예요. 평소에 이런저런 책을 읽어두면 필요할 때 떠오르니 너무 좋죠.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미움받을 용기>는 여전히 좋은 자극제가 됩니다.
철학자와 청년이 대화를 주고받는 형식의 책인데요,
아이가 공부를 전혀 안 해도 함부로 침범하지 말라고 철학자가 말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애를 방치하라는 거냐! 고 청년이 싹수없게 따지자 애가 부탁하지 않는 한 그렇다고 하죠.
부모자식 관계뿐 아니다,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다고 딱 잘라 말해요.
부모가 자식의 결혼상대, 직장에 대해 극렬히 반대할 때도 그건 부모님의 과제라고 무 자르듯 말합니다.
"부모가 슬퍼하든 말든 사이코패스처럼 굴란 말이오!" 청년이 기가 차서 말하자
"그래서 자네가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네. 인정받으려고 혈안이지."라고 똥침을, 아니 일침을 놓습니다.
아직 과제를 분리하지 못해 남의 과제를 내 것으로 생각한다고요.
부모가 자식과 나를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죠.
분리 못해 자식의 숙제까지 죄 끌어안고 참견하기 시작하면 아이는 아무것도 못 배우고 용기를 잃게 된다고 합니다.
구구절절, 굽이굽이 맞는 말 아닙니까.
과제의 분리는 방임, 방치하라는 뜻이 아니라 항상 관심을 갖고 도움을 청하면 도와주되 간섭하지 말라는 뜻인 것 같아요.
모든 인간관계에 다 해당될 겁니다.
막상 해보면 '오, 별로 할거 없어 편하네!'가 아니라 솟구치는 감정을 계속 다스려야 하는 어려운 길입니다.
어우, 속 터져, 이래라저래라 잔소리하는 게 차라리 쉬우니까요. 순간 스트레스는 풀릴지 몰라도 계속 반복하면 서로 만성이 되어 고질병이 되고 말 겁니다.
엄마가 50년 넘게 아버지에게 잔소리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던 것처럼요.
자식이라도 자꾸 남의 인생에 개입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릅니다. 말하려는 주둥이를 틀어막습니다.
처음이 어렵지 계속하려고 노력합니다.
남의 숙제는 하는 게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