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가상세계

by 선홍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일이지 않니? 내가 낳은 아이와 30년 정도의 시간차가 나는데, 한 공간에 살면서 관심거리를 공유한다는 것이.

부모랍시고 너에게 열심히 조언하고 잔소리하지만 너보다 오래 살았을 뿐, 사실 네가 더 똑똑한데 말이야.


OTT로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다시 보고 있는데, 네가 기웃거리다가 우연히 같이 보게 됐지. 나의 10대 시절이 떠올라 시시덕거리며 너에게 신나게 설명했더랬다.


'마이마이'같은 플레이어에 카세트테이프를 넣고 A면 다 듣은 후에 꺼내 뒤집어 넣어 B면을 들었다, 우린 급식이 없어서 쉬는 시간 도시락 까먹는 게 낙이었는데 넌 모르지? 도시락 반찬이 그날의 행불행을 좌우했다고.

난방을 연탄으로 해봤어? 연탄 본 적도 없지? 뜨거워진 연탄 위에 새 연탄을 올려야 잘 탄다, 연탄불 위에 국자로 달고나 만들어 먹으면 진짜 맛있었는데... 종이로 된 버스 회수권이랑 500원짜리 지폐도 못 봤지?

맞다! 나도 대학교 근처에 사는 바람에 자주 최루탄 냄새를 맡아 눈물이랑 콧물을 엄청 쏟고... 자랑인지 고생담인지 모를 얘기를 신나게 늘어놨었다. 넌 먼 나라 일처럼 킥킥대며 들었고.


집에서 영화를 보려면 비디오 대여점으로 가야만 가능했던 점 등 달라진 것은 지면을 꽉 채우고도 넘치지만 큰 흐름은 유사하다는 생각도 든다. 요즘보다 유치하긴 해도 나도 10대일 땐 말줄임이나 은어를 많이 썼어. 드라마에도 나오는 특공대 (특별히 공부 못하는 대가리), 옥떨매 (옥상에서 떨어진 메주처럼 못 생겼다), '방가 방가' 등등.


'라떼'는 'HOT', '서태지와 아이들'이 휩쓸었고, 덕질의 탄생을 알린 '빠순이'들이 등장했다. '방탄소년단', 'EXO' 등을 거치며 탄탄한 덕업을 쌓고 있는 너와 하등 다를 바가 없었지. 오빠들이 전 세계적인 스타가 된 것이 차이라면 차이랄까.

K- POP이란 말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J- POP나 미국 팝송에 열광했었어. 해외여행을 가도 똑같은 질문을 받았어. 넌 일본인이냐, 중국인이냐?... 아시아에 두 나라밖에 없는 줄 아나, 아주 짜증이 나더라고.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는 중년들이 많다는 얘기에 나와 같은 시절을 보냈으니 '국뽕'이 차오를 수밖에 없겠다고 느꼈다.

'프로듀스 101'이 한창 인기였을 때, 좋아하는 가수가 뽑힐 수 있게 전화투표니 뭐니 열성적인 너와 '대학가요제'를 보며 몇 번이 1등을 할지, 내가 마음에 둔 후보가 상을 받을지 점쳤던 내 모습도 겹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변화를 상징하는 단 한 가지 물품을 꼽으라면 그건 바로 전화기다.

지금처럼 한 사람당 스마트폰 한대를 갖는 시대가 올 줄은, 그것도 이리 빨리 올 줄은 꿈에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집

에 한 두대뿐인 전화기로 전화를 걸어야 친구나 애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에 상대의 부모님이 받으면 어쩌나 마음 졸이던 기억, 내 또래들은 다 있을 것이다.


'삐삐'에서 스마트폰으로 바뀌는 데 걸린 시간이 채 50년도 되지 않으니 너와 나 사이의 간극은 전화기로 설명할 수 있겠다. 더 이상 상대의 소식을 몰라 마음 졸이는 일도 없고, 이런저런 정보를 몰라 실수하는 일도 없어졌다. 스마트폰이 즉각 즉각 알려주고, 몇 초만에 답을 얻지 못하면 짜증이 난다. 우린 더 이상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다. 그렇잖아도 '빨리빨리'의 민족인데 말이다.


상대에게서 카톡이 오면 누구냐에 따라 바로 읽을지 좀 있다 읽을지 심리싸움을 한다. 대놓고 상대를 왕따 시키거나 폭력을 쓰지 않고 은밀하게, 지능적으로 괴롭히는 방법을 쓴다. 스마트폰을 능숙하게 쓰지 못할수록 바보처럼 느껴지고, 기계치인 어른보단 검색창을 열어 물어보는 게 더 속 시원하다. 기계가 발달할수록 유저로 태어난 세대와 배워야 아는 세대는 분리되고, 거리감이 생긴다.

인스타그램 등 SNS에 가짜 행복을 전시하는 일이 일상화되어 슬픔과 고통은 숨겨지고 격리된다. 마치 죽음을 숨기듯 묘지가 도시에 있지 않고 도시 밖으로 격리된 것처럼.


빛과 어둠이 한 몸이듯이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은 한 세트여야 하는 것인데, 한 면만 보고 살면 조금의 어둠에도 쉽게 절망하고 우울에 감염되지 않겠니. 스마트폰 속 가짜 세상에 갇혀 이상행동이나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늘어나는 걸 보면. 앞으로 메타버스 세상이 되면 가짜 세계는 더욱 리얼하고 견고해질 텐데 좀 걱정스럽다.

어른인 나도 코로나 시기에 스마트폰만 있으면 얼마든지 재밌는 영상을 보고, 취미도 배우느라 솔직히 친구를 직접 만나지 않아도 살아지더라. 자라는 아이들은 괜찮은 건지.


덕질이 '안전한 연애'의 대리 수단이 되기도 한다는데, 그 또한 밝은 면만 보는 것 아니냐. 연애란 게 실제론 얼마나 구질구질하고 치졸한 것인지, 상대와 나의 바닥을 보는 경험일진대. 그 경험을 통해 더 단단해지고 인간관계에 굳은살과 자신감과 생기지 않니. '대리 안전 연애'에 빠져 진짜 연애에 '앗뜨거!'하고 놀라 달아나버린다면 성장의 기회를 놓치는 것 아닐까. 꼭 '면대면'이어야 좋다는 생각 자체가 올드한 거라고?


솔직히 스마트 폰 덕에 일상이 편리해진 점이 훨씬 많지만 편할수록 문제점에 대해 꼭 생각해봤으면 해. 문제를 알고 쓰는 것과 모르고 그냥 쓰는 것은 디테일한 차이 같지만 시간이 흐르면 시선의 깊이에 큰 차이가 생긴다고 생각해.

엇, 드라마 한 편 보다가 멀리도 와버렸다. '라떼'의 잔소리라고 치부하지 말고 한 번만 생각해주라.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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