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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빌런을 만났을 때

by 선홍


회사를 다니다 보면 내 맘 같지 않고 불편한 거래처나 관계자를 종종 만난다. 같은 회사 내의 빌런에 관해선 다음 기회에 얘기하기로 하고.


영화제작사의 기획 PD로 재직했을 때였어. 상대하는 사람들이 감독이나 작가 같은 직업군이다 보니 다양한 개성만큼이나 일하는 방식도 천차만별이었다.


영화는 나처럼 기획하는 사람이 아이디어 기획서를 써와서 좋으면 만들어질 가능성도 있지만 작가나 감독이 써온 시나리오를 보고 할지 말지 정해질 가능성이 더 많아. 혹은 만화나 소설처럼 원작 있는 콘텐츠를 영화화하기도 하고.


원작이 있는 경우 원작자를 만나 저작권 계약을 하게 되는데, 덕분에 이미 유명하거나 반대로 아예 신인인 다양한 부류의 만화가, 소설가들을 만났어. 학창 시절 푹 빠져서 재밌게 봤던 만화를 그렸던 작가를 일로 만났을 때, 아이돌 스타를 만난 것처럼 흥분된 적도 있었어.


그러다 출판만화업계에서 전설 같은 분을 만났는데, 선 굵고 스케일 있는 만화로 유명하신 분이셨어. 스타일만큼이나 호탕하고 말씀도 재밌게 하셔서 계약을 진행하는 동안 기분 좋았는데 문제는 그 이후였어. 그분의 만화를 직접 시나리오로 각색해 써서 주시기로 했지만 약속한 기한이 넘어가도록 연락이 없는 거야.

작품 담당자인 난 돈이 나간 지가 언제인데 결과물이 안 나오냐며 여기저기에서 쪼임을 당했지. 뭐 자주 있는 일이었어.


창작의 고뇌를 헤아리느라 작가들이 작품 쓰는데 방해될 까 싶어 평소에도 회사가 '갑'의 입장이면서도 연락을 조심조심했어. 스트레스를 줄까 봐 조심히 연락하면 역시나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대답들이 돌아오곤 했지. 그러면 난 또 작가의 대변인처럼 윗분에게 작품이 늦게 나오는 이유를 변명(?) 해야 했고.


이렇게 지겨운 반복을 하다 보니 약속한 기한까지 써주는 작가분이라면 무조건 이뻐 보이는 거야. 그렇다고 결과물이 잘 나온다는 보장은 없더라. 약속한 기한까지 쓴 시나리오가 잘 나오기까지 했다면 그 작가는 '오고 초려'라도 해서 모셔와야 해. 성격 이상하고, 약속 개념이 흐린 사람이 글은 잘 쓰는 경우도 꽤 있으니까.


추상화 같고 애매모호한 점이 단점이자 매력인 창작의 세계에서 작가분들을 상대하면서 최대한 거슬리지 않게, 최고의 결과물이 나올 수 있도록 조율해야만 했어. 오만가지 문제가 있더라도 결과물만 좋으면 되니까.

어쨌건 업계 전설 같은 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작품은 언제쯤이나...? 하고 문의를 드릴 때마다 다양한 변명만이 되돌아왔어. 갑자기 노트북이 폭파되었다, 같은 성의 없는 변명만 나오지 않길 비는 와중에 그분의 연락이 두절되고 말았어. 말 그대로 .

이젠 내가 작가의 변명까지 지어내야 하는 판국인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웬만하면 전화는 받고 변명들을 하건만 그분은 시나리오가 상당히 지체된 상황에서 핸드폰을 꺼버리고 말았다.


유명한 작가일수록 오란 데가 많아 여러 곳에 계약이 되어 있어 지체되는 일이 잦았기에 참아보려고 했지만 이리저리 차이고 까이다가 억울함에 화가 치밀었지.

좀 프로페셔널하게 일할 수 없나? 대체 내가 왜 대신 변명하고 다니면서 무능한 사람 취급을 받아야 하지? 원고 내놓으라고 사채업자처럼 거칠게 굴었어야 하나? 내가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코뿔소처럼 코에서 김을 막 뿜어내는데, 상황을 보고받은 윗분이 계약금도 크고 심각한 상황이니 작가에게 '내용증명'을 보내라고 지시하셨어.

내용증명은 계약 이행을 하지 않으면 소송할 수도 있음을 예고하는 예고장 같은 거야. 그 사실을 상대에게 문자로 보내자마자 이런저런 이유로 연락이 안 되던 전설께서 황송하게도 빛의 속도로 전화를 주시는 거야.


이런저런 이유로 이렇게 저렇게 차일피일 늦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다고. 그래서 나도 이런 이유고 저런 이유고 간에 기다릴 만큼 기다렸으나 우리의 약속을 이리 우습게 여기시면 내 입장이 매우 곤란하다는 내용을 격앙된 어투로 말했어.


화도 내는 놈이 잘 낸다고, 심장과 목소리는 어색하게 떨렸지만 그래도 전달할 건 전달했어. 상대가 보기엔 내가 평소엔 작가님, 작가님하고 살살대더니 갑자기 사채업자처럼 구는 걸로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이후에 지혜로운 윗분의 '후려 감기 기술'이 들어갔어.

무슨 말인고 하니 '전설'과 윗분이 나중에 만났고, 전설께선 너무 바빠 결국 시나리오를 완성하지 못했으니 이미 받은 계약금은 전설분의 다른 저작권을 갖는 걸로 마무리되었지.


우리가 짜고 치는 정교함같은 건 없었지만 오랫동안 같이 일해온 '짬밥'으로 내가 '배드 캅'을, 윗분이 '굿 캅' 역할을 자연스럽게 맡은 것이지. 그 일이 잘 못 풀려 싸우기만 하다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면 회사에 큰 손실을 끼쳤을 거야.


회사는 나 혼자 일하는 게 아니다. 누군가에게 부탁하느니 어떻게든 해결하고야 말겠다는 압박 때문에 항상 너무 힘들었어. 도움을 청하는 게 내겐 더 힘든 일이었으니까.


혼자 틀어박혀 글을 쓰는 거면 몰라도 회사를 다니는 거면 주변의 동료와 윗사람을 이용(?)하고 도움도 청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게 무능한 게 아니라 되려 일 잘하는 게 아닐까. 물론 다들 바쁘고 경쟁이 치열한 곳이니만큼 공동의 이익이 걸린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겠지.


위로 올라갈수록 사람을 부릴 줄 알아야 하잖아. 빌런 같은 거래처를 만났을 때 혼자 해결하려고 애쓰지 마. 프리랜서라면 몰라도 회사에선 그런다고 일 잘하는 게 아니더라. 일본말로 '유두리', 즉 융통성을 발휘할 줄 알아야 해. 그럼 오늘도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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