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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너무 어려운 제사

by 선홍

또다시 명절이다.

결혼 전 명절은 내겐 휴일의 의미였으나 결혼 후엔 스트레스, 지출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다.


그 모든 것이 제사 때문이었는데, 명절이 낀 달엔 첫날부터 기분이 다운되었고, 21세기에 대학교육을 받고 살던 사람이 갑자기 조선시대로 강제 타임슬립 당하는 것처럼 언제나 당황스러웠다.


각자 열심히 살다가 명절날이라도 돼야 가족이 모여 회포를 푸는 시간은 소중하지만 제사를 둘러싼 모든 것이 너무 구시대적이라 납득이 되지 않았다. 몇십 년이나 제사를 지냈으면 그러려니 해야 하건만 도대체 난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인지 계속 불편함을 느꼈다.


일단 명절 전날엔 평소에 안 입는 막노동 복장을 꺼내 입고 시댁으로 향했다.

가자마자 동그랑땡, 동태전, 버섯, 고구마전, 두부전, 김치전 등을 며느리들과 연속 부치다 보면 기름 냄새로 속이 울렁대고, 등줄기에 땀이 흘러내렸다. 두통까지 생겨 열심히 부친 전은 먹기도 싫었고, 막걸리라도 한잔해야 울렁댐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지금은 만들지 않지만 추석엔 송편, 설날엔 만두도 손수 빚었다. 손 크고 인심 좋으신 시어머니 덕에 만드는 양도 어머어마했다. 만두피를 빚고 공장처럼 만두를 쌓아내고 나면 목, 어깨부터 허리까지 고통이 전달됐다.

이게 다가 아니라 나물, 산적, 생선구이, 탕국 등등 끝이 날까 싶은 음식 장만을 하고 나면 기름과 땀에 절여진 몸은 어디서 두들겨 맞고 온 것처럼 노곤해졌다.


누군지도 잘 모르는 - 사실 얼굴도 성함도 잘 모른다- 남편 쪽 조상을 위해 이런 노동을 하는 이유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먹을 만큼만 만들던지, 조금만 사서 올리던지 하면 될 것을, 조상님들이 산 사람들이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진정 원한단 말인가? 음식 장만하는 것 때문에 온몸이 피곤하여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들 간의 대화시간도 피하고 싶을 뿐이었다.


열심히 올린 제사 음식을 치운 후 식사상을 차리느라 며느리들은 또다시 부산스러워지는데, 남자들은 차려준 상에 숟가락을 들고 먹기만 한 후 자리를 비워줘야 여자들이 남은 음식으로 식사를 했다.


신혼 때 명절날 가장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자랄 때 나름 귀한 대접받고 살던 딸들이 무수리로 강등당하는 순간. 평일에는 직장 다니느라 힘든데, 명절엔 무수리의 삶이라니? 오랜 세월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살아온 시어머니는 그런 대접(?)에 아무런 위화감이 없어 보였고, 난 당황스러웠지만 그저 어른을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이왕 올리는 제사상에도 아들뿐 아니라 차리느라 고생한 며느리들 쪽 조상 이름도 한 귀퉁이에 세워주면 안 되나? 그런다고 조상님들끼리 감정 상해 싸우실까? 제사 지낸다고 잘 살고, 안 지내면 집안이 망하나? 그럼 미국과 유럽 사람들은 다 망해야겠네? 조상덕 보는 사람들은 해외여행 간다던데? 등등 별의별 생각이 다 들곤 했다. 나만 쓰레기?

제사란 것이 본디 힘들고, 산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아야 되는 것인가, 고민하던 차에 뉴스를 듣게 되었다.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가 이달 '차례상 표준화 방안'을 발표했는데, 이 방안의 핵심은 전을 부치지 말란 것과 음식 최대 가짓수가 9개면 족하다는 것이다.


송편, 나물, 구이, 김치, 과일 등 6개가 기본이며 거기에 육류, 생선, 떡을 추가할 수 있다고. 예의 근본정신을 다룬 '예기'의 '악기'편에 따르면 큰 예법은 간략해야 한다고도 했다. 기름에 튀기거나 지진 음식은 굳이 필요가 없단 말씀이시다. '홍동백서', '조율이시'도 예법 관련 문헌에 없다고 하는데. 차례는 조상을 위해 후손이 정성을 들이는 것인데, 이 때문에 가족갈등이나 불화가 생겨선 안된다는 것이 그 취지였다.


대체 이리 중요한 것을 왜 이제야 발표한단 말인가! 명절 때마다 고생해온 며느리로서 쌍수 들어 환영하는 바이나 억울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런 걸 발표했다고 해서 갑자기 집집마다 변화가 생기진 않겠지만 어쨌거나 요즘엔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이 늘어나고 있다. 더 이상 형식에 얽매여 남의 일, 내 일을 나누지 말고 다 같이 좀 즐거웠으면 좋겠다.


(막상 죽는다고 생각하니 아무도 날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게 좀 허무하긴 하다. 내 기일날에 바쁘지 않으면 작은 상위에 향 하나만 피워줄래? 상 위에 내가 좋아하는 빵이랑 커피만 사서 올려주면 더욱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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