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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ow snail Aug 24. 2023

산책

제초가 필요한 것은 둑길만은 아니다

청각이 예민해지기 시작한다.

8월의 마지막은 그런 시기다.

8월의 시작은 시간 감각을 잃어버릴 만큼 아찔하다.

방학과 맞물리는 휴가 기간이라 수업출석률도 들쭉날쭉하고, 어른도 아이도 달뜨다가 연일 계속되는 더위에 지치는 시기다.

어물쩍거리다 다가오는 개학으로  후닥거리며 준비하는 1주일을 보내고, 한숨 돌리는 8월의 마지막주는 한바탕 정신없이 놀고 난 후 어질러진 잔칫집 마당에 앉은 것 같다.


서너 번의 큰 물이 지나갔고, 산책로 곳곳에 물의 흔적이 남았다.


순차적 복구를 위한 차들의 왕래로 더위끝자락의 산책이 연일 웅웅거린다.


좋아서 하는 걷기에도 숨 막히는 더위에 정비하시는 분들의 움직임이 더없이 감사하다.


물이 땅을 뒤덮어 상처 난 땅 위에서도 풀은 이내 전의 모습을 찾아내고 있다.  종류별로 제각기 자란 들쑥날쑥한 풀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복구작업과 함께 시행된 제초작업뒤의 둑길과 잔디밭의 정갈스러움을 보니 정리의 소용을 새삼 깨닫는다.


온갖 여름 풀들이 만들어내는 초록의 무성함과, 고요한 아름다움으로 마음을 채가는 들꽃의 청초함이 산책의 정수라며 정설처럼 믿었다.

그런데 밤톨같이 제초된 둑길의 정갈함에 기분이 함박 좋아진다.

달콤하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한 풀냄새가 소용돌이친다.


뜨겁게 달구어져 나대는 마음이 한순간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비로소 가을을 맞을 준비가 된 거 같다.


걷는다.

온천지를 휘감는 들풀의 냄새에 휘감겨  향기의 분자가 된 것처럼 둥둥 걷는다.

2023년을 시작하고 다잡았던 마음들을 무성하게 덮어버린 생각의 풀들을 들여다본다.

미쳐 잡풀이라 생각지도 못한 생각자락들.

제초된 둑길을 걸으며 걷어내기 시작한다.


정기적 제초가 필요한 것은 둑길만은 아니다.

장마가 지나고 나면 풀들의 우거짐은 거칠 것이 없다.

둑길의 칡덩굴과 덩굴손이 들은 산책로의 반 이상을 침범하며 세를 넓힌다. 그것들을 싹 걷어낸 둑길을 걷는다.


열역학의 법칙은 세상의 모든 에너지는 처음과 동일하게 유지되며 또한 모든 에너지는 무질서를 향해 나아간다고 한다.


처음과 동일하지만 무질서한 마음의 에너지들을 다시 정돈한다.

둑길은 제초를 통해서 정갈한 모습을 갖추고,

마음은 제초된 둑길을 걷는 행위로 에너지를 재배열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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