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low snail Sep 06. 2023

일단 설거지부터 하겠습니다

머리와 마음이 말을 듣지 않을 때

지랄 맞은 성격이다.

쉬려고 앉으면 틀어진 물건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고 사는 공간이 틀어진데 하나 없이 각이 잡힌 것도 아니다.

구석구석 쌓여있는 책들과 가방,

온갖 종류의 필기구가 꽂혀 필요한 거 찾다가 청소할 각인 필기구통.

삶의 공간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정경이다.


근데 그런 게 있다.

아무렇지 않게 지내다가 어느 한 부분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면,

눈에 거슬린 그것을 정리하기 전까지 다른 게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스스로 이런 나를 지랄 맞은 성격이라 명명한다.

오죽하면 딸아이는 엄마의 청소기 소리만 들리면 슬그머니 문을 닫을까.

곧 불똥이 튈 차례임을 감지한 본능적인 대책이다.


한때는 정리 후의 희열을 직업으로 연결시킬까도 고민해 봤다.

정리 후 깔끔하게 정돈된 상태는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었을 때보다 더 뿌듯한 감정이 들게 했는데,

그 기분은 말로 표현이 불가능하다.



청소를 시작할 때를 돌이켜 보면 마음의 물결이 잔잔하지 못할 때다.

두서없는 마음들을 청소, 정리로 마음가지의 정돈을 대체하려는 심산이다.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들이 버겁지만 감정이 인간을 인간이게 한다.

[멋진 신세계]라는 소설의 한 구절에 의하면 무감정의 상태를 통제의 도구로 삼는 장면이 나온다.


너희들 삶에서 감정의 부담을 덜어주고,
너희들로 하여금 가능한 한 아무런 감정을 지니지 않게끔 보호해주기 위해서(...)
                                                                                                ㅡ멋진 신세계 중에서



인간의 뇌는 반복되는 행동은 인지하지 않는다고 했다.

반복되는 일상들은 나의 감각을 무디게 하기도 하지만,

나 자신조차도 감각해내지 못한 억제된 충동으로 감정을 범람하게 만들기도 한다.

결과는 광증에 가까운 청소타령으로 나타난다.


돌고 도는 순환의 바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사람들은 취미를 가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일을 시도하고, 여행을 떠난다.


나는?

나는 청소를 한다.

산더미처럼 쌓인 싱크대를 정리하는 일부터 시작해 청소기를 돌리고

선반에 쌓인 먼지를 닦아내고,

물걸레질을 한다.

물걸레질을 끝낸 바닥 위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공간이 정갈하다.


그리고...

책을 읽는다.


그리고...

이내 잠든다.


아이러니하게도 집이 정갈하게 정리가 된 상태라면,

마음밭은 그다지 정돈된 상태가 아니라는 거다.



그러나 청소는 무질서에서 정돈으로 가는 매개체가 된다.


그래서 일단 설거지부터 하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부모'라는 무게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