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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ow snail Sep 12. 2023

자화상

있는 그대로 그려내세요! 다음은요? 다듬어가면 됩니다

자화상,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

귀를 잘라 흰 가제 천을 얼굴에 둘둘 말고 있는 고흐의 얼굴과

인생의 고저를 가장 극명하게 경험하는 삶을 살았다는 렘브란트의 여러 자화상.

프리다 칼로의 어딘가 모르게 기괴하기도 보이는 자화상.


나의 자화상은?

아이들과 수업하면서 자주 가 닿는 화두 중에 하나가 '나는 누구인가?'이다.

어려워한다. '잘 모르겠어요~'라는 반응이 일반적이다. 내 눈에는 보이는 모습들을 스스로는 아무것도 자신을 소개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한다.  


첫맛남에서 자기를 소개할 때 소속과 나이를 말하고 나면 방향을 잃고 만다.

모임의 성격에 맞게 소개할 부분들을 몇 가지 언급하고 나면 더 이상의 할 말은 없다.

15초면 충분하다.


나를 정의해 주는 것들은 뭐가 있을까.

가족관계, 직업의 종류, 나이... 세 항목을 넘어서면 방향을 잃는다.


자화상을 그리면서 화가들은 자신의 모습을 어떤 심정으로 그렸을까?

16살의 딸아이는 초등 몇 학년 때부터였는지, 12월 마지막날 저녁 같은 시간에 자신의 모습을 셀카로 남긴다고 했다. '참 재미있네'라며 올초 몇 년간 찍어 두었던 몇 장의 사진을 보며 웃었더랬다. 셀카당시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미숙하고, 당시만큼은 진실했었던 모습들이 어리숙해 보이기도 하고 맑아 보이기도 했다.


셀카를 찍어 나의 얼굴을 남기는 일은 어색한 일이다.

녹음된 나의 목소리는 어딘지 멋쩍다.

아이들의 성장 기록 속에 남겨진 나의 얼굴들은 이상하지 않은데, 혼자 찍은 사진을 마주하는 일은 겸연스럽다.


육신적으로 젊음의 정점을 지나 하향 곡선을 그리는 신체의 변화를 마주하는 일은 더욱 낯설다.

매일 보는 거울에서는 보이지 않던 세월이 사진 속에는 얄짤없이  녹아들어 가 있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자존감이다.

나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이다.

뭐 어떤 일이라도 중간치기는 갈 수 있다는 자신감.

가끔 드라마틱한 타인의 삶을 보며, 인생 한 방이 없는 일상을 사는 삶이 초라하다 생각할 때도 있는데,

길게 늘어뜨려 놓으면 사람 사는 일이 고만저만 평균이라는 혜안도 있다.


그렇지만 머리에 그려지는 나의 자화상은 너무 평범하잖아!


지난여름 시골 마을에서 함께 나고 자라 같은 중학교까지  다닌 친구를 만났다.

중학교 졸업 후 간간이 엄마를 통해 친구의 근황을 듣기는 했지만 만나는 일은 전무했었다.

미국으로 건너가 터를 잡고 사는 친구가 6주 일정으로 고향집에 방문하는 시기와, 내가 친정집을 방문하는 시기가 겹쳐져 20년을 훌쩍 넘는 공백을 깨고 만났더랬다.

대화 물꼬를 트기 위해 친구의 삶과 내 삶의 간략한 소개들이 오갔다.

결혼과 자녀, 현재 하고 있는 일들을 말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간호사였었고, 현재는 아이들과 독서클럽을 하는 나의 이력을 친구는 멋있다고 말해주었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의료 행위를 할 수 있는 라이선스와 실제로 의료처치도 제법 손끝 맵게 해냈던 몸이 기억하는 기술들이 있다. 삶의 시계를 따라 현재는 좋아하는 읽기와 연결된 함께 읽는 일을 하는 독서클럽 운영자로 지낸다.


족적들을 써 놓고 보니 이력이 멋있어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를 앞두고 소제 찾기의 막막함을 호소하는데 대답은 간단하다.

흰 모니터를 눈으로만 보지 말라.

손가락을 키보드에 올리고 첫 단어를 시작하라.

"그다음은요?"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손가락을 키보드에 올리고 첫 단어를 시작해보지 않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나의 자화상을 찾는 일도 같은 원리인 거 같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고민하는 일은 언제나 막막하지만,

생각하기 시작하면 나의 면모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면모들이 만족스러울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면 자화상을 고민하는 가운데 불만족스러운 면모들을 다듬어 가면 된다.

아이들과 함께 자주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는 이유를 이 아침 다시 찾아낸다.


자화상을 고민해 보길 참 잘했고,

키보드에 손을 얹고 첫 단어를 시작하길 참 잘한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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