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들갑 독일문학
3일 연속 야근을 하고도 업무가 줄기는커녕 계속 늘어나 심란해졌다. 지금 하는 일이 과연 내가 원했던 일이었나. 미래는 있는가. 더 늦기 전에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은 아닌가. 잘하고 있는 건 맞는지.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한도 끝도 없이 늘어나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잠을 이룰 수 없을 거 같아 발걸음을 친구 A의 집으로 돌렸다. 친구 A는 아끼는 와인을 꺼내고 치즈와 크래커를 가지런히 놓으며 나를 맞이했다. 나는 짐을 풀며 자리에 앉자마자 고민을 털어냈고, 친구 A는 와인을 한잔 마시며 조언을 평범하게 하나 싶더니 역시나...
“너가 이제 3년 차인가? 딱 3년 차가 할만한 고민이네. 원래 인생이란 그런 거 아니겠니. 너의 고민을 들으니 마침 딱 좋은 책이 떠오르네. 24페이지에 줄 친 부분 한번 봐봐. ‘자신의 인생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그는 알지 못했다.’ 너의 고민과 닮지 않았니? 소설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어느 3월 6일간 베를린의 최고급 호텔에서 일어난 일인데. 초반에는 세세하고 감각적인 묘사로 영화처럼 장면이 그려져서 흥미롭다가 51페이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데, 오터른슐라크 박사와 크링엘라인의 대화에서 던져지는 무거운 메시지가 예사롭지 않지. 근데 거기서 끝이 아니야. 소설 하면 뭐야! 갈등이요. 갈등하면 소설이잖아. 등장인물 간의 얽히고설킨 갈등이 완전 소설 속으로 빨려 들어가! 아, 눈에 그려지는 듯한 묘사, 숨 막히는 전개, 입체적인 캐릭터 구성. 이 3박자가 완벽하게 구현된 소설을 운명처럼 만난 기분이랄까. 소설 속 인물들을 보면, ‘내 인생만 망한 거 같은데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사람은 저마다의 십자가와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구나. 우리는 너무 애를 쓰며 괜찮은 척하고 살아가고 있구나.’ 너의 고민도 소설을 다 읽고 나면 해결까지는 아니어도 도움이 될 거야. 소설이 쓰인 시대적 배경이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데 당시에 독일에서 고급문학에서 대중문학으로 확장되던 시기였대. 덕분에 여성작가 활동도 많아졌고. 그랜드호텔이 대표적인 소설로 인기가 많았대! 그럴만해! 흥미로운 전개에 전쟁 이후 변화된 생활과 가치에 대한 메시지까지 담고 있으니 말이야. 아! 언젠가 소설 속 여성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너랑 해보고 싶은데. 얼른 읽어오면 어떻겠니? 근데 어떤 사건이 일어났냐면 말이야....”
친구 A의 조언인지 책 영업인지 애매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와중에 이번 달 카드값 문자가 도착했다. 카드값을 확인하니, 나의 길은 분명히 지금 하는 일이 맞는 길인거 같고. 아니 맞아야만 하며! 오늘 맛있는 와인을 마셨으니 힘을 내어 내일 출근해 열심히 일하고, 회사의 월급날을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랜드 호텔/ 비키 바움(박광자 옮김)/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