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들갑 독일문학
2주 전부터 조카로부터 어린이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전화를 거의 매일 받았다. 갖고 싶은 선물이 뭐냐고 물어보면 고민해 보겠다는 조카에게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쓰디쓴 진리를 알려줄까 싶어서 적당한 선물을 고민하고 있었다. 유익하면서도 센스가 느껴지고, 더불어 나를 향해 “최고예요!”라는 달콤한 말을 들을 수 있는 선물이 뭐가 있을지 도통 답을 찾을 수 없었을 때, 친구 A는 호들갑스럽게 말문을 열기 시작하는데...
“뭘 고민해! 책이지 책! 자라나는 새싹에 영양분이 되어줄 마음의 양식! 책 아니겠니! 너도 이거는 읽어본 적 있을 텐데. <좀머 씨 이야기> 알지! 오랜만에 다시 읽으니깐 너무 좋더라. 삽화도 예쁘고, 분량도 길지 않아 쉽게 읽히더라고. 주인공이 키가 1m를 빠듯하게 넘기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돼. 주인공이 살던 동네에는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햇볕이 쏟아지나 매일같이 종일 걸어 다니는 아저씨가 살았대. 그게 바로 좀머 아저씨인데, 동네에서 그 사람의 정확한 이름, 목적 없이 걷는 이유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배낭을 메고 지팡이를 밀려 걷는 좀머 씨의 정체는 알 순 없지만, 눈에 쉽게 띄는 건 확실했지. 어렸을 때 이 소설 읽으면서 되게 재미있었는데, 다시 읽으니깐 느낌이 다르더라. 소설은 좀머 씨의 정체를 알아낸다거나, 좀머 씨가 중심이 되어 사건이 발생하는 이야기는 아니야. 오히려 주인공이 어린 시절의 사건과 감정에 집중해. 왜, 어린 시절에 즐거웠던 순간 못지않게 두려웠던 순간도 생생하게 기억하곤 하잖아. 주인공도 그런 순간을 떠올려. 호되게 혼이 난 주인공이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에 자신이 사라지는 상상을 해. 여기서 나 완전 감정이입 됐잖아! 나도 그랬거든. 너무 속상하던 어린 시절 ‘내가 사라지면 사람들이 슬퍼할까?’라고 상상한 적 있거든! 사실 진짜 사라지고 싶은 게 아니잖아. 나 좀 봐줬으면, 내 마음 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인 거잖아. 주인공이 그때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는데 갑자기 오은영 박사의 솔루션을 들은 듯 어린 시절 ‘내’가 치유 받는 기분이 들더라. 어... 잠시만, 이거 어른들을 위한 독일문학인가? 아 아닌데, 나 어렸을 때 되게 재미있게 읽었는데...”
친구 A가 말했듯이 장자크 상페 작가의 삽화도 귀엽고 해서 고민하던 중 지난 크리스마스, 산타한테 책 선물을 받고 엉엉 울며 집어 던지고 난리를 피웠다는 조카의 일화가 떠올랐다. 유익한 선물을 주는 것도 어른으로서 중요한 역할이겠지만, 나는 사랑받는 어른이 되고 싶으니 조카의 보호자에게 힌트를 얻기로 했다. 그래! 올해 어린이날 선물은 너로 정했다. 신비아파트 어둠의 퇴마사 고스트 Z 디럭스 세트!
<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유혜자 옮김)/ 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