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에 어울리는 독일문학

호들갑 독일문학

by 박효경

호들갑 독일문학 14

- 장마철에 어울리는 독일문학



나는 기분이 날씨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 날씨의 노예다. 장마철이면 맥을 못 춘다. 평화로이 휴식을 취하며 잠들어야 할 밤에 이런저런 생각으로 몇 시간을 뒤척이고, 아침엔 낮은 기압에 일어나기가 너무 힘든 요즘. 악순환이다. 오늘도 침대에서 몇 시간은 뜬눈으로 지새워야 하나 싶어 ASMR을 듣는다는 심정으로 친구 A에게 전화를 걸었다. A는 역시 장소와 시간을 따지지 않고 영업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잠이 안 와? 책을 읽으면 되겠네. 너 책 5페이지만 읽어도 바로 잠들잖아! 평화를 바라는 너에게 마침 추천하고 싶은 소설이 떠오르는구나. 하인리히 뵐의 <천사는 침묵했다> 읽어봤니? 소설 분위기가 밝거나 전개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거나 그렇진 않은데.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기에 좋더라. 폐허 문학이라 명명되는 만큼 소설의 분위기는 황량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돼. 주인공 한스가 탈영 죄로 총살형을 당할 처지에 놓이는데, 군사 재판소의 서기가 한스가 처형 직전에 도망칠 수 있도록 돕거든. 서기 덕분에 살게 된 한스는 그 길로 서기의 부인을 찾으러 나서. 그와 목숨을 맞바꾼 값으로 서기의 상의를 부인에게 전해야 할 것만 같았거든. 한스가 의무감에 부인을 찾으러 다니는 것부터 이야기가 시작돼. 전쟁은 소설은 사건보다는 문체가 최고야. 묘사표현이 뛰어나서 황폐한 모습이 그려질 뿐만 아니라 불쾌한 냄새와 끈적이는 촉감까지 느껴져. 등장인물이 청소하는 장면이나 의사에게 진찰받는 장면은 읽어가면서 슬프면서 동시에 서늘해지거든. 근데 나를 책 속에 계속 머물게 하는 건 한스와 사제의 대화였어. 제도화된 종교는 계속 절차와 원칙을 따지더라. 종교의 교리를 따르지 않은 주인공을 나무라는 게 유달리 거부감이 들더라고. 신자로서 교회에 대한 의무를 요구할 때 오히려 따지고 싶어지더라고. 그동안 신은 어디에 있었는지 말이야. 에휴, 근데 또 무슨 신 탓을 해 나쁜 짓은 인간이 다 하지 뭐. 역시 인간이 제일 나빠. 근데 더 좋은 게 뭔지 알아? 이 책 읽고, 제발트가 쓴 <공중전과 문학>를 읽잖아? 그러면 하인리히 책이 더 좋아져! 책도 술과 안주처럼 페어링하기 좋은 것들이 있는데 이게 딱이야 딱!”



보통은 친구 A의 속사포 같은 영업을 듣고 있으면 졸리기 시작하는데 정신이 더 또렷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인리히에서 제발트 영업으로 넘어가는 동안 나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잠의 세계로 인도할 철학책 하나를 꺼내왔다. <불안의 개념> 책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친구의 ASMR과 해독이 필요한 수준의 서문을 읽다 마침내 잠이 들었다.


<천사는 침묵했다/ 하인리히 뵐(임홍배 옮김)/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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