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들갑 독일문학 23
친구 A가 할 말이 있다고 집으로 불렀다. 차가 끓는 동안 나는 친구 A도 아는 친구 D와 오랜만에 만났던 얘기를 먼저 꺼냈다. 경연프로그램을 좋아하는 D가 요즘 꿈이 <고등래퍼>에 나가는 거라고... 요즘 랩핑연습을 한다는 엉뚱한 얘기를 친구 A에게 전해줬다. 그러나 예상도 못 한 반응이 돌아오는데...
“걔가 참 딕션이 좋았지. 응원하는 의미로 D를 만나면 책 한 권 선물해줘야겠다! 요즘 래퍼들 경연대회 나가려면 디스 랩 잘해야 하지 않나? 기가 막히게도 참고하기 좋은 책을 찾았는데 말이야.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옛 거장들>이란 소설이거든. 아 진짜 장난아냐! 음악평론가인 레거가 할 얘기 있다고 아츠마허를 불러놓고는 혼자 3시간 가까이 계속 떠들다가 마침내 만나자고 한 이유를 말하고는 급 이야기가 끝나. 게다가 아츠마허는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먼저 도착해서는 레거를 관찰하면서 전날 레거가 해줬던 얘기를 회고하는 내용이 또 초반에 이어지거든. 그러니깐 소설의 98%가 레거의 말과 레거에게 들은 아츠마허의 회상한 얘기로 채워지는 거지.
계속해서 떠들어대는 레거 캐릭터도 심상치 않아. 36년간 빈 미술사 박물관을 이틀에 한 번씩 틴토레토의 <하얀수염의 남자> 앞에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낸대. 그렇다고 틴토레토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도 아냐. 웃기지.
끊임없이 쏟아내는 레거의 말속에서 거침없이 쏟아내는 거장들에 대한 비판을 읽을 수 있어. 음악, 미술 포함해서 세상만사를 디스하는데 또 이게 맞는 말 대잔치인 거지. 정신없이 쏟아지는 레거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이것이야말로 힙합 정신이 아닌가 싶어. 어떤 작가와 화가를 디스하는지 궁금하지 않니. 오스트리아 빈에 대한 비판도 일리가 있거든.
요즘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태도를 생각해보기 좋은 기회가 되더라고. 베른하르트 이번에 알게 된 작가인데 열정적인 냉소함에서 난 반하고 말았지 뭐야. 이번에 다른 작품이 리뉴얼돼서 나온다던데 너무 기대된다. 그것도 랩핑에 도움이 되려나? D 전화번호가 뭐였더라? 일단! 고등래퍼를 나가려면 고등학교에 입학을 해야겠네. 재입학이 되나?...”
웃자고 말한 친구 D의 근황에 진지하게 자신의 영업을 얹으려는 이 친구는 편견이 없는 건지, 영업에 미친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친구 A의 얘기를 듣고 있는데 왜 나는 레거라는 이가 친구 A인 것만 같지. 오늘 만나자고 한 이유는 언제... 설명해줄까? 이제 1시간 지났으니 2시간 더 필요한 건 아니겠지...?
<옛 거장들/ 토마스 베른하르트(김연순, 박희석 옮김)/ 필로소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