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들갑 독일문학
전날 어쩐지 피곤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5시에 깨어보니 친구 A의 문자가 도착해있었고, 나는 서둘러 SNS를 켰다. 역사 교과서에서만 볼 거라 생각했던 단어와 함께 믿기지 않는 영상들이 쏟아졌다. 하나 정보 값도 없던 재난문자도 잘만 오더니, 이 사태를 모른 채 잠들어 있던 내가 황당한 채로 출근길에 올랐다. 모든 것이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사실이 다행인지 잘 모르겠는데도 하루를 보내야 하니 당장의 일을 쳐내고 돌아오는 퇴근길, 쏟아지는 친구 A의 메시지...
“친구야. 나는 결심한다. 마침내 알았어. 내가 있어야 할 곳, 내가 가야 할 곳. 내가 마침내 도착해야 하는 곳 말이야. 소설 <세상의 모든 여자는 체르노보로 간다>의 주인공 바바 두냐는 방사선의 영향을 여전히 받고 있던 고향 체르노보로 돌아가. 오염된 땅에 다시 밭을 일구고, 그곳을 가꾸며 봄을 기다려. 가족들이 그녀에게 떠나라고 부탁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어. 남성 중심의 권력이 만들어낸 폭력, 전쟁, 재난에 반대하고 바바 두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체르노보를 지켜내.
넌 그렇게 생각하겠지. 이 와중에도 책 얘기를 떠들어대냐고. 그러게. 근데, 문학은 혼란을 피하지 않더라. 마음졸여 손톱을 물어뜯으며 잠 설쳐가며 해제 요구안이 가결되는 걸 기다렸어. 190명의 찬성을 보고 나니 긴장이 살짝 풀렸는지 몸이 아프더라고. 심란한 마음은 여전해 잠이 오지 않아서 책장을 살피다 이 제목이 눈에 들어오더라고. 나는 매번 떠날 궁리를 했거든. 답이 없다고. 나를, 우리를, 그들을 환대해 주지 않는 이곳이 싫고, 화가 나고, 질리고, 우스웠거든. 조금이라도 빨리 잠들었으면 하는 마음에 책을 읽는데, 알겠더라고.
사실 나는 남고 싶었나 봐. 바바 두냐가 그녀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중요한 가치를 지켜냈듯이 나도 나의 방법으로 남아서 그걸 지켜내고 포기하지 않고 싶어졌어.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투쟁하겠다. 친구. 너도 너의 가치를 수호하라. 너의 도착과 나의 도착이 같길 바라며... ”
친구 A의 긴 메시지를 받으며 나는 도착의 장소에서 친구 A를 기다리겠노라 되뇌었다.
<세상의 모든 여자는 체르노보로 간다/ 알리나 브론스키(송소민 옮김)/ 걷는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