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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hmitz cabrel Oct 27. 2024

최초의 것



“무서워하는 것에 일가견이 있습니다.” 라는 말은 별 쓸모없는 문장이다. 무서워하는 것을 잘해서 어쩌자는 건가? 그게 성격이라 한들 특성이라 한들 어디 가서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면접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저는 어떤 사물이든지 그 안의 무서운 점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당신 옆에 놓인 화분의 흙은 매우 축축할 겁니다. 이끼가 자라있기 때문인데, 이끼를 만지면 촘촘하고 징그러운 모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손으로 한 번 느껴보세요. 화분의 모르는 면을 알게 되실 수 있을 겁니다. 모르는 면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이지요. 현미경으로 보면 제 말이 무슨 뜻인지... 라고 말하면 붙을 수가 없는데다 (있지도 않은) 사교 모임에 가서 말하더라도 요상한 사람 취급을 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니까 이 문장은 아주 사소한 것이다. 그저 나의 (혹은 나와 유사한 사람들의) 소박한 면을 설명할 뿐이다. 


  이런 특성이 처음 발현한 순간을 기억한다. 나는 대여섯 살이었고 등촌동에 살았다. 하루는 같은 층 동갑내기 친구가 할머니 댁에 가서 세살 터울의 언니와 언니 친구들과 놀아야 했다. 방해꾼인 나는 구박을 받으면서도 언니들을 따라다녔다. 오후가 되자 언니와 친구들은 놀이터에서 숨바꼭질 놀이를 하기로 했다. 나는 술래를 하기에는 너무 어렸으므로 대충 아무 곳에 숨으면 됐다. 나는 멀리 숨으면 떼어놓고 놀까봐 놀이터와 가까운 수풀에 가서 숨었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쭈그려 앉았다. 언니들은 “여깄다!” 혹은 “반칙이야!” 라고 소리치며 서로를 찾았다. 나는 기다렸다. 누구라도 좋으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달려와 내 이름을 부르며 날 발견해주길 바랐다. 점점 소리들이 작아졌다. 수풀 사이로 놀이터를 힐끔거렸다. 조금 더 참았다. 이건 함정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버리면 숨어있던 언니들이 “찾았다!” 라고 소리칠 것이다. 다리가 저려왔다. 아스팔트 바닥을 짚은 손바닥에 아스팔트 무늬가 생겼다. 인기척이 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놀이터로 달려나갔다. 아무도 없었다. 동네 사람들도 지나가지 않았다. 개미도 기어가지 않았다. 나는 정적에 빠진 아파트촌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언니들을 불러봤지만 어디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몇 층이어도 좋으니 누가 복도로 나와 빨래를 털어주었으면, 아기라도 울어 주었으면, 내 뒤에 와서 “잡았다!” 라고 말해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놀이기구들만이 삐걱거렸다. 나는 모래 위에 주저앉았다. 그때 모래 사이로 뭔가 반짝거리는 것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유리 조각이었다. 콜라라는 멋들어진 영어가 새겨진 깨진 유리병. 깨진 단면이 빛에 반사되어 묽은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였다. 손을 뻗었다. 날카로운 촉감과 함께 손에서 붉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주변은 여전히 고요했다. 나는 집으로 올라갔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단지 모든 곳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날 그곳은 아무도 살지 않는, 살아있지 않은 장소였다. 차가운 돌계단을 오르는 동안 손에서 계속 피가 흘러내렸다. 그 순간에도 들리는 것은 나의 발소리뿐이었다. 나는 가다 서다 하다 멈춰 섰다. 무언가 뒷꿈치를 자꾸 붙잡는 것 같았다. 뒤를 돌아보았다. 조용한, 보이지 않는 손가락이 내 종아리를 기어 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것의 알아들을 수 없는 속삭임이 엄습하는 동안, 나는 혼자였다.  


  집은 소란했다. 엄마와 언니 친구들의 엄마들이 분주히 요리를 하고 있었다. 화장실에 들어가 물로 손을 닦고 휴지로 감쌌다. 휴지가 빨갛게 물들었다. 당시 난 어둠을, 밤을 무서워했다. 그런데 그날엔 작고 좁은 옷장으로 스스로 들어갔다. 작은 어둠이 차라리 따뜻했다.


  이후로 나는 밝은 대낮에도 어디 있어도 두려웠다. 어느 찰나 내가 모든 것이 없는 세계에 혼자 남겨진 느낌이 들 때면 모두가 각자 이런 세계를 갖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각자의 것이기 때문에 이 세계는 오로지 내 것이라는 사실에 가끔 몸서리를 친다. 재빨리 다른 인간이 만든 근거 없는 문장을 내 문장에 덧붙인다, 나는 두려워하는 것을 잘한다. ‘두려움은 슈퍼 파워이자 동행자다. 덕분에 우리는 함께 할 수 있으며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닥터 후 시즌8 4번째 에피 <Listen>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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