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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먹어도 칭찬은 날 춤추게 해

18. 둠칫두둠칫

by 서눅희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여름에 남아있던 잎들은 색이 바래고 세상이 가을색을 입더니 그마저도 정신 차려보니 다 지고 떨어졌다.

어느 날 아침에 겨울이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앉아있는 걸 보았다.


곧 해가 바뀔 테고 한 살 더 먹게 될 터이다.

어릴 때, 어른들이 넌 나이가 몇이니? 하면 바로 튀어나왔다. 저는 00살이에요!

이제는 내가 몇 살이지? 하며 내 나이가 바로 나오지 않는다. 보통 '00년 생이예요.' 하는 편이다.

내 나이 계산은 당신이 해주세요.


내 나이는 이제 결코 어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연륜이 찬 나이도 아니다.

그저 어른 요금을 내야 하는 '어른'의 범주에 들어가는 나이가 되었을 뿐이다.


20대를 지나고 나면 흔들리지 않고 가는 길의 방향을 다 알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생의 안정기가 찾아올 것이라 막연히 상상했던 것이다.

현실은, 여전히 앞 날에 대한 불안, 걱정 그리고 기대 같은 것들이 뒤섞인 마음으로 한 발 한 발 내딛는 중이다.


얼마 전까지 커리어에 대한 불안이 아주 컸다.

다방면으로 내 실력에 대한 불신이 커서 나를 의심하는 일이 잦았다.

그런 시점에 본사에서 갖는 onsite, 팀 이벤트가 있었고 팀원들과 사수를 만나 피드백도 받고 칭찬도 받았다. 나이를 먹어도 칭찬 받으면 기분이 좋다.

자기 확신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때로는 나를 보는 타인의 말이 필요할 때가 있다.


내가 약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인 '효율적 의사소통'이 팀원들에겐 전혀 문제가 아니고 나의 구조적 의사전달 방식이 좋다는 답변을 받았다.

코팅면에서도 지금껏 해 낸 업무들도 기대 이상으로 해내고 있다며 긍정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한시름 놓였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잘하고 있다, 잘 버티고 있다고 이야기해 줄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생각해 보면 어리지 않은 나이에 새로운 무언가를 도전해서 얼른 이뤄내야 한다는 중압감이 컸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내 나이는 신경 쓰지 않는데 말이다.


사실 해외 생활을 하면서 나이에 무뎌진 편이다.

일상생활이나 업무를 할 때 굳이 서로의 나이를 알 필요가 없고 사람들은 궁금해하지 않는다.

꽤나 관계가 가까워지고 나서야 나이를 알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내경우 직속 상사와 동료의 나이를 입사 1년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다.


처음 직속상사, 사수의 나이를 듣고 사실 흠칫하긴 했다.

나보다 어리...잖아...?

CEO 나이를 듣고도 같은 반응이었다.

나보다 한 살 많잖아..?


그 짧은 순간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우스웠다.

나이에 무뎌졌다느니,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해놓고선 막상 귀에 꽂히는 숫자를 들으니 '난 여태껏 뭐 했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비교. 남들과 나를 비교하는 것.

내가 지우고 싶은 내 모습 중 하나가 걸러질 틈도 없이 거침없이 수면 위로 솟았다.


한국에선 생의 주기에 따른 과업이나 성과표 기준이 정해져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기준표에 맞춰 나와 타인들을 줄지어 끊임없이 비교하는 일은 외면하려 해도 썩 쉽지 않았다.


해외 생활에서도 그런 타인과의 비교는 존재한다.

결코 이곳에선 그런 일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여기 사람들도 비교하고 이리저리 재고 따진다.


다만, 같은 상황이라도 수용하는 내 마음이 변했다. 원래 있던 곳에서 떠나왔기 때문에 생기는 어떠한 자유로움 때문일 수도 있고, 유러피언 감성에 젖어서 일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면서 내 안의 무언가가 바뀌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나이가 먹어도 나는 나라는 사실이다.

3살 어린 나이에 받은 칭찬이 기분 좋듯이, 30살이 넘어도 칭찬받는 걸 좋아하는 나.


그 나이에 해내야 하는 과업 같은 것은 없다.

나이를 먹는다고 다 나잇값을 하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나이가 많다고 다 어른도 아니고 나이가 든다고 현명함이나 지혜가 절로 쌓이지도 않는다.


다만 내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들, 노력했던 것들은 시간의 축적과 비례하고 순행한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대단한 성과가 아닐지라도.

그런 것들을 하루하루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면 매일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런 생각을 하면 나이가 드는 건 꽤나 근사한 일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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