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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물고기 Sep 17. 2022

도덕적 허세는 어떻게 올바름을 오용하는가?

《그랜드스탠딩 : 도덕적 허세는 어떻게 올바름을 오용하는가》


그랜드스탠딩이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도덕적인 말을 하는 것이다.
 
부제를 보자마자 얼른 사러가야 겠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고색창연한 주의 주장을 능수능란하게 말하고 쓰는 이들에게서 갖는, 언어로 표현할 길 없었던 왠지 모를 꺼림칙함(옮긴이의 말 중에서)'을 느끼고 있기도 했고, 아마도 나 자신도 분명히 그랜드스탠딩을 했거나 하고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개선의 팁을 얻고싶었기 때문이다.
 
떠오르는 예시들이 많아서인지 어렵게 생긴 것에 비해서 빨리 읽을 수 있었다. 이런 종류의 책은 그냥 읽으면 마지막 장에 이르렀을 때 내가 뭘 읽었는지도 기억나지 않게 되기 때문에 메모나 요약을 하면서 읽는 편인데, 읽고 쓰면서 웃기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2장 : 도덕적 그랜드스탠딩이란 무엇인가?


   도덕적 그랜드스탠딩의 기본 공식   
   
1. 그랜드스탠딩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도덕적 자질로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길 원한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욕구(recognition desire)라고 부른다.   
   
2. 그랜드스탠딩을 하는 사람들은 공적 도덕 담론에서 뭔가를 말함으로써 그 욕구를 충족하려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공개적 전시를 그랜드스탠딩 표현(grandstanding expression)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간단한 공식으로 그랜드스탠딩을 생각할 수 있다.   
   
그랜드스탠딩=인정욕구+그랜드스탠딩 표현   
   
종종 그랜드스탠더는 자신이 도덕적 성인이나 도덕적 영웅으로 여겨지길 바란다. 또 어떤 때는 조금 더 평범하게 자신을 도덕적으로 예의 있는 사람 정도로 생각해주길 바라기도 한다. (중략) 어떤 경우 그랜드스탠더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도덕적 훌륭함에 대해 막연하게 긍정적인 인상을 갖기를 원하는데, 그때 목적은 자신의 선善의 편이라는 데 전반적인 감탄과 존경을 받는 것이다. 또 어떤 때는 조금 구체적인 것을 원한다. 공정함이나 도덕적 진보로 여겨지는 자신의 견해가 정말로 특별하다고 생각해주길 바란다. 혹은 도덕적 쟁점에 관한 자신의 민감함에 다른 사람들이 깊은 인상을 받길 바란다. 자신만큼 지진에 슬퍼하거나 최저임금법에 분개하는 사람이 없다는 식이다. 또한 자신이 가진 도덕적 우선순위는 흠잡을 데가 없다고 다른 사람이 생각해주길 바란다. 예컨대 자신의 트위터 팔로워들은 세금 부담을 줄이는 데 주로 신경쓰지만, 자신은 정의를 최우선으로 신경쓴다는 것이다. 또 어떤 경우 그랜드스탠더는 자신이 문제해결 방법에 관한 도덕적 통찰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길 바란다. 다시 말해, 자신이 극단적 빈곤의 원인이 무엇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음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봐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 사회적 위상에 따른 욕망의 형성이라는 것 안에서 그랜드스탠더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심리학자들은 사회적 위상을 얻는 데 명성(prestige)과 지배력(dominance)이라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설명한다   
   
명성과 지배력의 차이는 그랜드스탠더의 동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많은 경우 그랜드스탠더는 도덕적 자질 측면에서 명성을 추구함으로써 지위를 높인다. (중략) 그러나 어떤 그랜드스탠더는 더 어두운 목적을 위해 도덕적 이야기를 한다.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그랜드스탠딩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말로 위협을 하고 굴욕감을 준다. 또 자신의 경쟁자를 폄하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인상을 남기려고 하는데, 이것은 모든 평범한 인간의 충동이다. 자신의 명성을 높이려고 애쓰기보다 다른 사람들의 콧대를 꺾어 위상을 얻으려고 한다. "입 닥치고 세상에 대한 내 의견을 따라라. 안 그러면 나는 당신을 모욕하고 당황하게 만들 거야! 내가 여기서 유일하게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이야!" 그랜드스탠더는 대개 도덕적 명성을 좇는데, 어떤 사람은 기를 쓰고 지배력을 좇는다.   
   
소설 미디어에서 다른 사람들을 모욕하고 침묵시키기 위해 고매한 도덕적 선언을 하고 도덕적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피억압자들을 옹호하고 옳은 것을 지킨다고 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그런데 이들은 얼굴을 맞댄 사적 대화에서는 같은 방식으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도덕적 명성, 더 심하게는 사회적 이익을 위해 타인을 지배하고자 공적 플랫폼을 이용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간략히 말해, 공적 담론에 참여하는 진정한 동기 면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 기만에 빠진다. 사람들은 자신도 알지 못한 채 그랜드스탠딩을 한다.   
   
현재 그랜드스탠딩에 대한 대중적인 이해와 달리 이것은 비단 좌파의 문제만이 아니라 훨씬 일반적인 행위다. 다만 극단적인 정치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중도적인 견해를 가진 이들보다 명성을 얻으려고 그랜드스탠딩을 좀더 한다.   
   
그랜드스탠딩은 자기과시를 위해 도덕적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 현상에 대한 우리의 기본공식에 따르면, 다른 사람들이 도덕성 면에서 자신을 좋게 생각해주길 바라는 어떤 욕구(어떤 힘)이고, 그 욕구를 채우기 위해 공적 담론에 참여하는 것이다.  


 
 




3장 : 그랜드스탠딩의 실제 모습


   우리는 그랜드스탠딩을 하는 이들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다섯가지 방법, 즉 보태기piling on, 치닫기ramping up, 날조하기trumping up, 강렬한 감정 표출, 무시dismissiveness라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보태기piling on   
   
우리는 연대를 표현하는 많은 언술이 칭송받을 만하고 그것들을 그랜드스탠딩으로 묘사하는 건 부정확하다는 데 동의한다. 우리가 염두에 둔 연대를 표현하는 언술 유형은 주로 발화자가 연대하고 있는 사람들을 도우려는 열망에서 기인한 것들이다. 그런 경우, 발화자의 동기가 단순히 자신이 어떤 도덕적 가치를 가졌다고 인정받길 원할 뿐이라고 하는 것은 틀린, 불완전한 묘사다. 결정적으로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인정을 얻고자 희망하고 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말한 것으로부터 무언가 이득을 얻는 사람이 발화자인 자신 뿐이라고 하면, 실망하거나 어쩌면 약간은 죄책감도 가질 것이다. 반면 그랜드스탠더는 그리 실망하지 않는다. 그랜드스탠더는 자신이 좇는 인정을 받는 데 기뻐하고 거기에 실패하면 실망할 것이다.   
   
   
치닫기ramping up   
   
사람들이 치달을 때는 더 이상 올바른 도덕적 주장에 도달하려고 하지 않는다. 서로를 능가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런 행위의 동기는 자신이 도덕적으로 가장 훌륭하다는 인상을 남기고픈 욕구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정의 문제에 좀더 익숙하고, 다른 사람들은 상황의 뉘앙스와 심각성을 이해하거나 인식하지 못한다고 알리기 위해 점점 더 강렬한 도덕적 주장을 한다.   
   
우리는 인정욕구로 동기화된 많은 대화가 도덕적 무기경쟁이 되는 것까지도 예상할 수 있다. 치닫기는 도덕성과 정치에 대한 많은 대화가 왜 그렇게 빨리 감당할 수 없게 되는지 설명해준다. 관세에 대한 이견으로 시작된 것이, 누군가가 대부분 도덕적 문제에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나치라고 부르면서 끝이 난다.   
   
   
날조하기trumping up   
   
그랜드스탠딩이 왜 그렇게 날조 형태를 자주 띠는지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랜드스탠더는 도덕적으로 훌륭하게 보이길 열망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정확하게) 본 사안들을 도덕적 문제로 몹시 규정하고 싶어 한다. 인정 욕구는 사람들이 진정한 도덕적 문제를 찾아내 주의를 환기하도록 이끌기도 하지만, 결국 가장 만만한 표적이 선택될 것이다. 적당하고 발견하기 쉬운 나쁜 행위의 사례들은 이미 알려져 있다. 그러나 새로운 도덕적 비판을 찾아낼 (아니면 발명할) 동기는 항상 존재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날조를 한다.   
   
혹자는 우리가 새롭거나 인기 없는 도덕적 주장 전부를 날조라고 주장한다고 우려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주장은 그것과 다르다. 우리는 도덕적 쟁점이 대체로 주류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다는 걸 부인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다른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부정의에 주의를 환기토록 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지금의 평범한 견해들은, 수십 년 전만 해도 굉장히 논쟁적이었다. 어떤 도덕적 쟁점들은 새로울 뿐 아니라 타당하기도 하다.   
   
   
강렬한 감정 표출   
   
그랜드스탠더는 도덕적 자격을 보이기 위해 다른 강렬한 감정들도 손쉽게 활용한다. 충격표현(도무지 00을 믿을 수가 없어), 실망(00에 엄청나게 실망했어), 역겨움(난 정말 00이 역겹기 짝이 없어) 모두 눈에 띄는 후보군이다. 마음 맞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떤 도덕적 사안에 아무런 대가 없이 저항운동을 하는 사람을 자기는 '경외'한다고 말하는 한 친구를 떠올려보라.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는 분노나 다른 강렬한 감정의 모든 표현이 그랜드스탠딩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많은 악이 있고, 우리가 목격하는 분노와 비애의 상당수는 진심어린 것들이며 심각한 도덕적 문제들을 향해 있는 적절한 것들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분노가 겉보기에 잘못 향해 있거나 과한 감정적 반응을 보일 때마다 그 사람이 그랜드스탠딩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무시dismissiveness   
   
그랜드스탠더는 무시를 할 때가 많다. 이것이 그랜드스탠더가 대화에 참여하는 데 불만을 느끼고, 그것을 어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 비해 자신을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른 사람의 도덕적 견해와 가치관을 생각할 가치조차 없는 것처럼 취급하는 건 완전히 다르다. 그런데 많은 그랜드스탠더가 바로 그런 방법을 사용한다. 보통 그랜드스탠더의 오만은 자기를 증명하는 주장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예를 들어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치자.   
   
"만약 당신이 그 전쟁의 정당성을 보지 못한다면, 당신 의견은 경멸할 가치조차 없고 나는 더 이상 당신과 교류하지 않겠소. 당신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걸 설명하느라 내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오. 잘해보시오."   
   
물론 어떤 도덕적, 정치적 견해는 다른 견해들보다 더 무시할만하다. 누군가는 인신공양이나 수용소를 두둔할 때마다 하루에 얼마간 시간을 내어 그것들의 장점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을 하는 게 아니다. 또한 합리적인 사람들이 어떤 도덕적 주장은 명백하게 진실이고 어떤 것은 도리를 벗어난 것인지 합의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타인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함을 주장하려고 거만한 도덕적 이야기를 활용하려고 거만한 도덕적 이야기를 활용한다는 우리 주장에 영향을 주진 않는다. 자신의 의견과 다른 일체의 의견은 말이 안 되는 조롱의 대상이며 즉시 묵살해도 괜찮다는, 자신의 도덕적 정당성을 확신하는 것은 위험하다. 도덕적 자기 고양의 어두운 면은 동의하지 않는 거의 모든 의견을 묵살하는 데 구실을 준다는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주장하듯, 타인이 그랜드스탠딩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보다 자신이 어떻게 그랜드스탠딩을 피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4장 : 사회적 손실


   중도파가 대중적인 도덕적, 정치적 담론에서 이탈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좋지 않다. 가장 뚜렷한 부정적 결과는 토론을 피하는 사람들이 상대편 의견의 증거와 주장을 듣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자신의 믿음도 검증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틀렸다고 설명하는 다른 사람들과 토론을 하지 않으면 빈약하게 만들어진 신념을 유지하기 쉽다. 그런데 어쩌면 더 나쁜 것은 사람들이 신념을 혼자만 갖고 있으면 나머지 세계는 그 접할 수 없는 생각들을 끝내 얻지 못한다는 점일지 모른다. 침묵하는 중도파가 진실한 믿음을 가졌다면 다른 사람들은 결코 그 진실을 발견할 수 없다. 설혹 침묵하는 중도파가 틀렸더라도 그들의 믿음을 옹호하는 까닭은 다른 사람들이 진실에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생산적인 토론을 만들기 때문이다. 건강한 공적 담론은 모든 종류를 다룬다. 그래서 활발하게 토론되는 아이디어의 영역이 줄어들면 우리 모두가 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   
   
중도파가 이탈하고 없기 때문에 활동가들이 정치 담론을 장악하고 있다. 정치학자 다이애나 머츠는 정치에 가장 많이 관여하는 사람이 정치 스펙트럼의 가장 끝에 있는 활동가라고 했다. 머츠에 따르면 활동가는 가장 낮은 수준의 '교차 노출 cross-cutting exposure'에 놓이는데, 이는 그들이 자신의 의견과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을 만날 확률이 가장 낮은 집단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많은 활동가는 다른 편에 있는 사람들이 실제 어떻게 생각하는지 거의 모른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6장 : 덕이 있는 사람은 그랜드스탠딩을 할까?


   니체의 힘에의 의지will to power 개념부터 시작해보자. 니체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본능적으로 힘의 느낌을 극대화하는 것에 동기를 부여받는다고 주장한다. (중략) 니체는 인간 모두가 삶에서 똑같이 탁월함을 잘 추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목적을 이루는 데 지배의 느낌을 극대화함으로써 큰 만족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좌절을 겪는다. 때론 큰 좌절을 겪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문제가 생긴다. 실제 가치있는 일을 성취함으로써 힘에의 의지를 발현하지 못하는 사람은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기보다 그 조건들을 바꿔버린다. 그들은 잘 사는 것의 의미를 재정의하고 다른 사람의 성공을 경시하려 든다. 그 결과가 니체가 도덕에서 '노예 반란slave revolt'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것은 실패한 사람들이 자신의 실패에 대한 위로로, 자신에게 가치있는 것이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을 뜻한다. 그 결과로 니체는 진정한 인간의 탁월함이 낮게 평가되고 경멸받는다고 생각한다. 귀중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문화적 감각이 그러한 시도에 대응해서 바뀔 때, 니체가 가치의 '평가절상revaluation' 이라고 부른 것을 이끈다. 전에는 인간의 실패를 표시한다고 생각되던 것이 이제는 도덕적 선함이 된다. 전에는 탁월함으로 간주되던 것이 이제는 도덕적 악이 된다.   
   
우리는 보통의 도덕 상태에 관한 전반적, 실질적 평가에 대해 니체와 매우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우리가 비난하는 변화 중 일부, 특히 모든 인간을 도덕적으로 평등한 존재로 광범위하게 인정하게 된 것은 긍정적인 발전이며 심지어 위대한 문화적 성과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 책에서 우리는 니체가 거부했을 만한 많은 내용을 말했다. 우리가 몇 가지 점에서 니체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전반적으로 그는 도덕성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준다. 즉, 사람들은 지배력을 느끼고자, 심지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행사하고자 자주 도덕성을 이용한다. 당연히 이 통찰을 통해 우리는 그랜드스탠딩을 새로운 시각에서 생각할 수 있다 .    
   
(중략) 우리가 니체로부터 얻은 교훈은 상식적인 도덕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이야기가 종종 약하거나 절망적인 늑대가 뒤집어쓴 양가죽이라는 것이다. 그랜드스탠더는 힘을 직접 써서, 즉 실제로 자신이 원하는 수준의 탁월함을 성취함으로써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는다. 그랜드스탠더는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을 가치있는 성취라고 스스로 말하고, 자신을 높이는 도덕적 자질을 드러내어 전시한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교묘한 수이긴 하지만 정정당당하지 않고 때론 잔인하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힘이 있다고 느끼게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들이 이룬 성취는 없다. 그랜드스탠딩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은 실제 탁월함을 이루는 것과 다르다.  






8장 : 변화를 위한 방법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을 반대하며   
   
사람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노력 중 하나는 혼을 내는 것이다. 누군가의 엉망인 때를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인간적인 충동이다. 그것은 그랜드스탠딩을 해결하는 명백한 방법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이 그랜드스탠딩을 한다는 생각이 들 때 그것을 지적하는 것 말이다. (중략) 그러나 우리는 그랜드스탠더를 비난하는 것은 공적 담론을 개선하는 데 대체로 나쁜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그랜드스탠딩을 비난했을 때 발생하는 또다른 문제는 개념 변이conceptual drift가 '그랜드스탠딩' 같은 용어에 재빠르게 안착되는 것이다. 개념 변이는 한때 명백했던 한 개념이 느슨하게 연결된 현상까지 다루기 위해 경계가 확장될 때 발생한다. (중략) 정의내리기 힘든 용어와 확인하기 어려운 행위는 유독 변이되기가 쉽다. 그 수순은 예측가능하다. 사람들은 실질적인 참여 없이도 발화자를 무시하기 위해 그랜드스탠딩이라는 비난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다음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불편하게 만드는 누구든 반대하면서 그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개인 차원의 변화   
   
상황을 다듬어라   
   
상황의 변화를 만드는 것은 공적 담론에서 자신의 행동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루에 몇 시간씩 트위터를 찬찬히 살피고도 독선적인 그랜드스탠딩을 담은 트윗을 오리지 않을 만큼 화를 내지 않을 거라 생각할지 모른다. 여러분은 비록 자기와 같은 마음인 친구들로부터 폭넓은 칭찬을 받을 걸 알아도, 선동적이고 과장된 주장을 페이스북에 올리는 것은 피할 수 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에게 그 유혹은 너무 강해서 저항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유혹의 상황을 완전히 피하는 것이 종종 더 낫다. 다음은 몇 가지 제안이다.   
   
- 소셜미디어에 쏟는 시간에 제한을 둬라.   
- 소셜미디어에서 정치를 토론할 때 성급하고 무절제한 사람들을 뮤트하거나 언팔로우하라. 그런 종류의 행동, 특히 '상대편'이 하는 행동을 보는 것은 그랜드스탠딩을 하고싶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삼진아웃제' 규칙을 실험해보라. 누군가 여러분을 세 번 화나게 하거나 짜증나게 한다면 언팔로우하라.   
- 다른 편에 대해 여러분을 흥분케 하는 극단적으로 당파적인 뉴스를 피하도록 해보라   
   
   
계획   
   
도덕적 이야기를 개선하고픈 사람들에게 실행 계획은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너무 화가 나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강한 유혹을 느낄 때 그러한 계획이 도움이 된다.   
   
-화나는 정치게시물을 본다면 나는 새 인터넷창을 열어 스포츠 기사를 읽거나 넷플릭스를 보거나 이메일에 답장을 보낼 것이다. 정치와 관련 없는 어떤 것이라도 할 것이다.   
-멍청하고 알지도 못하는 걸 말하는 사람을 보면 나는 그것을 고치려고 달려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온라인에서 도덕과 정치에 대해 누군가에게 짓궂게 나르시시스트적으로 말하면 공개적으로 사과할 것이다.   
   
   
인정욕구를 재설정하라   
   
자신의 도덕적 자질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좋은 인상을 받길 원하는 것은 강렬하고 자연스로운 욕구다. 여기에서는 이 욕구를 자제하고 그랜드스탠딩을 피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그 방법들은 인정 욕구를 만족시키는 다른 생산적인 출구를 찾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공적 도덕 담론은 명성을 좇기에는 마땅한 장소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도덕적으로 훌륭하다는 인상을 갖게 하는 더 나은 방법들이 있다. 더 좋은 결과를 낳고, 다른 사람을 존중으로 대하고 자신을 더 유덕한 사람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들 말이다. 이러한 방법들은 분명 도덕적으로 바람직하고, 다행스럽게도 찾기도 어렵지 않다.   
   
   
사회 차원의 변화   
   
철학자 크리스티나 비키에리는 나쁜 사회 규범을 더 나은 규범으로 바꾸는 자세한 전략을 시도했다. 규범을 바꾸는 비키에리의 접근에서 힌트를 얻어, 우리는 형세를 그랜드스탠드에 반대하는 흐름으로 바꿔 더 효과적이고 정중한 공적 담론을 향한 전략을 제안하려고 한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이 같은 상황에서 나아가길 바란다.   
   
현재 규범 : 많은 사람들이 그랜드스탠딩을 하고 그것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함으로써 보상을 받는다.   
   
새로운 규범 : 그랜드스탠딩을 실제로 하거나 그것을 하는 것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사람들이 그랜드스탠딩을 해도 보상을 받지 않는다.   
   
   
1단계 : 믿음을 바로잡기   
   
사실에 대한 믿음은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믿음이다. 그랜드스탠딩 문화를 개혁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 일부를 바꾸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 첫째, 대부분은 자신에 관한 믿음을 바꿀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뛰어난가라는 문제에 대해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다. 우리 모두 자신의 도덕적 자질을 과장하는 도덕적 자기고양자다. 둘째,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다. 우리는 자신이 도덕적으로 얼마나 괜찮은지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거나 듣고 싶어 하는 정도를 과대평가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데 그랜드스탠딩이 실제 효과보다 훨씬 더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 셋째, 공적 담론에 기여하는 효과에 대해서도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다. 그랜드스탠더는 자신의 행동 결과에 너무 낙관적이다.   
   
   
2단계 : 좋은 본보기가 되어라   
   
정치에 관해 말하는 것은, 어떤 사람들에게 그냥 다른 사람들을 어리석게 보이도록 하거나 당황시키는 촌철살인의 말을 트위터에 쓰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자신을 더 낫게 보이는 것뿐이다.   
   
<우리는 왜 논쟁하는가(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책에서 철학자 스콧 에이킨과 로버트 탈리스는 정치적 불일치가 악화되는 많은 방법을 논하고, 공적 담론에 기여하는 방법 몇 가지를 제안한다. 그들은 먼저 1)우리가 모든 문제를 손쉬운 해결책이 있는 간단한 문제로 다루지 않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더 나아가 에이킨과 탈리스는 논쟁을 할 때 전제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많은 도덕적 그랜드스탠딩은 화를 내거나 충격을 표현하거나 무시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입을 막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분노와 충격은 주장이나 논리가 아니다. 2)누군가 뭔가 잘못했다고 생각되면, 그 사람이 말한 것을 거부하기 위해 여러분의 논리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하라. 마지막으로, 에이킨과 탈리스는 3)대화에서 자신이 틀린 것을 알았거나 다른 사람이 좋은 내용을 말할 때는 그것을 인정하고 독려하라고 한다. 단호한 태도는 체면을 살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차이에서 비롯된 생산적인 불일치에 대한 해결책은 아니다.   
   
우리가 제안하는 마지막 안이 하나 더 있다. 도덕적인 이야기를 할 때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에게 더욱 엄격하라. 우리 모두는 자신보다 다른사람들을 더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그렇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독특한 일련의 도덕적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평가한다.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도덕적 잣대 때문에 더 나빠 보이게 된다. 게다가 우리는 자신의 실패를 나쁜 운이나 통제 불가능한 환경 탓으로 돌리지만, 다른 사람의 실패는 그들의 나쁜 성격 탓이라고 한다. 이것은 불공평하다. 우리는 스스로의 편견에 맞서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무죄추정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철학자 로버트 풀린와이더가 이렇게 쓴 것처럼 말이다. "도덕성은 우리에게 분업의 기본을 강제한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에 대한 자비와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함을 필요로 한다."   
   
   
3단계 : 그랜드스탠더를 제재하라   
   
우리는 그랜드스탠더를 비난하는 것은 나쁜 생각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런 사람들이 그랜드스탠딩하는 것을 불쾌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상황을 호전시키는 다른 제재의 형태들이 있다. 잠정적이지만 몇 가지 안이 있다.   
   
그랜드스탠딩을 불쾌한 것으로 만드는 한 가지 방법은 그랜드스탠딩하는 걸 민망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여러분은 무대응으로 댕으할 수 있다. 소셜미디어에서 칭찬, 페이스북의 '좋아요', 트위터의 리트윗을 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명백히 인기를 얻기 위해 도덕적 신념을 옹호하는,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소셜미디어 상에서] 입장을 표명하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이건 대단히 용기 있는 말이야" 같은 코멘트를 달지 말라. 미디어 홍보에서 어떤 정치인이 좋은 사람으로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지지하지 말라. 직장에서 혼자 옳다는 식의 행태를 보이는 사람들을 무시하라. 핵심은 관심을 좇는 그들의 행동에 점수를 주지 말라는 것이다.   
   
그랜드스탠딩을 제재하기 위한 우리의 두 번째 제안은 더 공격적이고 그래서 조금은 조심스럽다. 여러분이 뭔가를 은폐하기 위해 그랜드스탠딩을 하는 사람을 볼 때, 즉 우리가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자신이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덜 의심받으려고 그랜드스탠딩을 하는 사람을 본다면, 그사람이 감추고자 하는 나쁜 행동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는 것을 고려해보라. 물론 이것을 가볍게 해서는 안된다. 비난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누군가를 잘못했다고 비난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랜드스탠더의 희생자들이 그들 삶의 세세한 내용이 대중에게 주목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합당한 이유가 있을 수 있기에, 그 비난을 쏟아내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그러나 뭔가를 덮기 위한 그랜드스탠딩은 위험한 현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랜드스탠더의 행동에 속고, 그 결과 그랜드스탠더는 다른사람들에게 나쁜 짓을 계속 아무렇지 않게 한다.  




 
이 책의 흐름은 대략 다음과 같다.
 
그랜드스탠딩의 개념 → 그랜드스탠딩의 양태 → 사회적 손실(왜 그랜드스탠딩은 악덕인가?) → 그랜드스탠딩에 대한 도덕철학적 관점에서의 고찰(니체와 덕 결과주의virtue consequentialism 관점 등장) → 제도정치에서의 그랜드스탠딩 → 개선방안(개인적/사회적 측면)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 활동에 몹시 피로감을 느끼게 된 계기를 되짚어보니 어떤 이슈가 생길 때마다 그 '판'에서 명성과 지배력을 갖춘 '오피니언 리더'들을 필두로 하여 우수수수 경쟁적으로 저마다 뭐라도 의견을 표명해야만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때 그 진흙탕 싸움의 단편들을 돌아보건대 이 책에서 말하는 그랜드스탠딩의 양상(보태기piling on, 치닫기ramping up, 날조하기trumping up, 강렬한 감정 표출, 무시dismissiveness)이 빠지지 않았다.
 
다만 (저자들도 고려하고 있는 문제이지만) '개념 변이'가 우려되기도 했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무분별한 조롱(이미 '깨시민', '프로불편러'라는 말이 조롱의 의미로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또는 생소하지만 논의할 필요성이 있는 모든 도덕적 주장을 손쉽게 하찮은 것으로 만들고 입막음할 수 있는 낙인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저자들은 순전히 도덕적 자기과시를 위해서 하는 그랜드스탠딩과 실제로 우리 자신과 이웃, 세계를 더 좋게 만드는 강력한 도구로서의 도덕적 언사를 엄밀하게 구분할 수 있는 지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결국 그랜드스탠딩과 그랜드스탠딩이 아닌 도덕적 주장의 차이라면, 단지 이목을 끌고 과시하기 위해서 하는 말일 뿐인지 아니면 실제로 그러한 도덕적 신념의 성취를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는지에 달린 것인가?
 
솔직히 말같지도 않은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아직도 공격하거나 빈정대거나 대화를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너무나 강하다. 그러나 이 책이 말하는 것은 인간이 원래 자기 눈의 대들보보다 남의 눈의 티끌을 더 잘 찾는 존재니까 당장 '일침'을 가하고 '사이다 발언'을 하고싶더라도 일단 좀 진정하고 성숙하게 논쟁하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라고 이해했고,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전통적 덕 이론/덕 결과주의/니체 윤리학의 관점에서의 그랜드스탠딩 비판을 다루고 있는 6장도 재미있다. 도덕철학에 대한 견해에 관련하여 개인적으로는 니체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으나, 니체의 개념을 활용한 그랜드스탠딩 비판은 흥미롭다. 현실에서도 '피억압자'가 비를 맞지 않도록 유효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고민과 과정은 끈기가 필요하고, 자극적이거나 감정적이지도 않고, 재미도 없고,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 어렵다. 그래서 그 길을 포기하고 실질적인 문제 해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자극적인 구호만을 반복하면서 같이 비를 맞고만 있는 행위보다도 덜 주목받고, 인기가 없고, 낮게 평가된다는 점이 생각났다.
 
7장 제도정치에서의 그랜드스탠딩 파트에서는 정당을 막론하고 속속 떠오르는 얼굴들이 많다는 점이 재밌으면서도 속상한 점이다. 뒀다가 선거 때가 다가오면 한번 더 읽어봐야겠다.
 
생각하고 표현하고 소통해왔던 방법을 돌아보고 정비할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하나의 개념을 얻어서 타인들을 판단하고 혼내주기 위한 무기로서보다 자아성찰의 도구로 읽으면 더 좋을 것 같고, 마지막 장을 보면 그게 저자들도 의도한 바인 것 같다. 연휴동안 재밌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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