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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물고기 Sep 17. 2022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없다

《슬픈 짐승(Animal triste)》

Oskar Kokoschka, The Bride of the Wind(Die Windsbraut)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없다.
그것이 대답이었고, 그 문장을 마침내 말로 꺼내 얘기하기 오래 전부터
이미 나는 그 대답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Post coitum omne animal triste est."

모든 짐승은 교미 후에 슬프다.



애인이 학부 때 들었던 라틴어 수업에서 배웠다고 알려준 이 라틴어 경구는 열정적인 순간이 격렬하게 지나가고 나면 인간은 허무함을 느낀다는 의미로도 의역되어 사용된다고 한다.


이 말을 들으면 오스카 코코슈카의 그림 <폭풍우(부제 : 바람의 신부)>가 떠오른다. 그림에는 아마도 사랑을 나눈 후(post coitum)인 것 같은 흐트러진 이불 위의 연인이 있다. 여자는 곤히 잠들어 있고, 남자는 우울하거나 불안하다(animal triste).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고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Animal triste)》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 전에 군산에 여행을 갔다가 월명동의 독립서점에서 이 책을 샀다.


번역이 좋지 않은 편이라서 문장이 잘 읽히지 않고, 내내 턱턱 걸리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지만 어쨌든 끝까지 읽었다.


화자는 구 동독 출신의 여자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에 여자는 서독 출신의 고생물학자인 남자를 처음으로 만났다. 그녀는 자신이 백 살이나 아흔 살 쯤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뿐, 정확히 몇 살인지도 알지 못한다. 애인이 떠난 후에 떠나간 사랑을 애도하고 회상하는 일만 하면서 몇십 년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애인의 이름도 이제는 기억하지 못해 어떠한 다른 남자 지인의 이름과도 중복되지 않는 '프란츠'라는 이름을 지어 부를 뿐이다.


오래 전에 읽은 오르한 파묵의 《순수박물관(Masumiyet Müzesi)》이 생각나게 하는 이야기였다. 남자는 사랑했던 여자가 떨어뜨린 귀걸이 한짝, 피웠던 담배꽁초를 포함하여 그녀와 관련된 모든 물건들을 수집했고, 그녀의 옛 집을 사서 물건들을 전시할 박물관을 세우는 일에 일생을 바친다(작가는 이스탄불에 실제로 그 박물관을 만들었고, 이 책에는 박물관의 입장권이 새겨져있다).


두 이야기를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모두 집착에 가까운 그야말로 정신나간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읽어 나가다 보면 몇 페이지에 한 번씩 아니 이렇게까지 해야 해? 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문학을 읽는 이유 중의 하나는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타인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범주화해서 대충 비슷해보이는 인식의 바구니에 간단히 던져넣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다.


모든 짐승이 '교미' 후에 슬프다는 말은 '현자타임'을 암시하는 우스갯소리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열망하고 원하는 것, 도달하고 나면 모든 것을 다 가진 기분일 것만 같은 지상의 모든 것에는 사실 그런 힘이 없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열망하는 곳에 도달하기 위해서 인간은 언제나 새롭게 근심한다. 하나의 고지에 도달하는 순간에 열정에 들뜨지만 언제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고 새로운 고지를 점령하러 나아가야 한다.


그러니 《슬픈짐승》과 《순수박물관》의 이 미친 사랑의 주인공들은 새로운 고지를 점령하러 나아가든, 이미 도달한 고지에 머물며 열정의 기억을 회상하면서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든 인간은 본디 슬픈 짐승(animal triste)이라는 것을 깨닫고 후자를 선택한 사람들일 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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