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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물고기 Oct 09. 2022

스물아홉의 파랑새 찾기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요아킴 트리에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를 보러 아트하우스 모모에 갔다. 학교다닐 때는 가까워서 자주 갔는데 최근에는 언제 마지막으로 갔는지 가물가물할 정도라 이대 ECC 안에서 헤매기까지 했다. 커피 반입이 안되는 점과 영화 시작 전에 마땅히 기다릴 곳이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노르웨이어 원제는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라는 뜻이라고 한다. 정말로 율리에는 그렇게까지 세상 최악의 인간인가? 물론 영화에 나타난 그의 언행을 살펴보면 '굿플레이스'에 들어가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는 다소간 허영심도 있고, 가끔 말도 못되게 한다. 그리고 끈기없이 금방금방 뭔가를 그만둔다고 윗세대의 지탄을 받는 MZ세대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유별나게 시작한 일을 항상 끝맺지 못하는 사람이다. 서른을 코앞에 두고도 방황을 거듭하고 남자친구의 집에 얹혀 살고 있으면서 자신은 똑똑하고 특별하다는 자부심을 놓지는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심한 면이 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아무도 모르는 자기 모습이 있다. 대단히 엄청난 비밀이 아니라 사소한 복수심, 욕망, 냉소, 죄의식이라도 자기의 최악의 모습은 자기가 제일 잘 안다. 환각버섯을 먹고 정신이 나갔을 때 추하게 변해버린 율리에의 몸과 불쾌하고 괴이한 장면들은 이성의 끈이 멀쩡할 때는 도달할 수 없는 내면의 밑바닥을 표현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는 자기가 한심하다는 것을 자기도 알고 있는 것이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 율리에는 그렇게 말하고 악셀을 떠난다. 무슨 궤변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개소리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타협지점이 없는 의견의 차이로 함께 있는 것만으로 숨이 턱 막히고, 더이상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하기 어려운 순간이 왔는데 마음에도 관성이 있어서 여전히 인간적으로 몹시 아끼는 마음은 남아있는 그런 상황인 것이지.





그렇게 율리에는 악셀을 떠나서 에이빈드와 살기 시작한다. 율리에는 에이빈드에게 '너와 있으면 내가 완전해진다'고 말했지만, 머지않아 새로운 관계에서 또다른 종류의 결핍을 느끼게 된다. 머지않아 에이빈드와도 헤어지고 나서 시간이 흘러 율리에는 사진작가로 일을 계속하는데, 우연히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져 아빠가 된 에이빈드의 모습을 보게 되면서 영화는 끝난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함께 빠져들었지만, 모든 게 끝나고 나면 각자 혼자 힘으로 빠져나와야 하는 것. 그 구지레한 과정을 통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뼛속 깊이 알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다.



그는 진로를 모색할 때와 똑같은 태도로 연인을 만날 때에도 '파랑새 찾기'를 거듭해왔다. 김연수의 이 말처럼 악셀과의 사랑에서 빠져나오는 '구지레한 과정'을 지켜보면서 관객도 율리에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어떻게 살아온 인간인지를) 알게되고, 분명 율리에 자신도 그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질풍노도 청춘의 방황과 허황되어보이는 꿈을 좇는 성장일기는 그리 새로운 서사가 아니다. 그렇지만 사랑에 빠져들고 빠져나오는 과정의 긴장과 설렘과 환희와 두려움과 갈등과 좌절과 회한을 그린 장면들이 극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북국의 복지국가라 그런지 직업 없이 방황하면서도 딱히 먹고 살 걱정은 안하는 것 같다는 점을 제외하면) 보편적이고 지독하게 현실적이어서 감동이 있었다.

일이든 사랑이든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파랑새 찾기를 멈추고 정착해야 한다. 자의로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사람도 있지만, 만약에 정착하기를 원하는데도 부유하는 삶을 원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자신의 결핍을 빠짐없이 완벽하게 채워줄 사람을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모든 사람에게는 고유한 욕망이 있고 누구도 타인의 결핍을 채워주기 위한 모양새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와 있으면 내가 완전해진다'는 말은 순진할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이기적이다.

아마도 정말로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되는 때는 상대에게 매력이나 감동을 느끼는 순간이 아닐 것이다. 기분 좋은 긴장감과 설렘은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지만, 그런 감각은 쉽게 온다. 그래서 그것이 전부라면 아직 어딘가 다른 곳에 파랑새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그런데 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할 때조차 상대의 악의 없음을 확신하게 될 때, 그래서 그것을 바꾸기 어렵다면 내가 견디겠다고 결심하게 될 때가 오히려 자신은 정말이지 큰일났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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