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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물고기 Nov 09. 2022

가능한 최선의 세계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요즘 감흥이 생기는 것들이 적어져서 고민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엄청난 영화를 보게됐다. 지난번 영화관에 갔을 때 광고영상을 봤는데 엥 이건 뭐지? 괴랄하다. 이러고 넘겼다. 그도 그럴 것이 다중우주 멀티버스 어쩌구 하는 SF나 히어로물은 원래 내가 즐겨 보는 장르가 아니다. 며칠 전에 만난 극본을 쓰시는 분이 "이 영화는 정말.. 사람을 갈아 만든 맛이 나요."라는 평을 남겨주지 않으셨다면 볼 생각을 안했을거다. 만오천원에 사람을 갈아 만든 맛을 볼 수 있다? 시간될 때 꼭 봐야겠다고 생각만 하다가 마음에 부담이 생기는 일이 발생해 홀가분하지만은 못했던 금요일 퇴근길에 가벼운 야근을 하고 마음이 헛헛해져 충동적으로 영화관에 들렀다.

그리고 이 영화는 정말로 사람을 갈아 만든 맛이 났다. (주 52시간 내에 만들 수 없는 영화) 대체 무슨 약을 빨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건지 너무 어이없고 기가 막혀서(핫도그 손가락ㅋㅋㅋㅋㅋㅋㅋㅋ) 미친듯이 웃게 하다가 또 말도 안되는 장면으로 눈물을 빼게 하며, 몹시도 사랑스럽다(눈알 달린 돌덩이�). 호불호 갈린대서 별 기대 없이 갔는데 러닝타임 내내 오늘 영화관과 집의 갈림길에서 영화관을 선택했던 이 우주의 나를 칭찬하고싶었다. 머리채 잡혀 139분동안 종횡무진 우주를 휘젓고 다니다가 크레딧이 올라갈 때쯤 되면 영화관 의자에 다시 던져진 기분이 드는데, 정말 간만에 가슴이 쿵쿵 뛰는 영화였다.




#고작 한 줌의 시간

이블린은 근심도 고역도 이혼신청서도 세무조사도 없는 무의 세계에서의 고요와 평온 대신에 상식과 진심이 통하는 시간은 가끔가다 고작 한 줌 뿐인 너절한 삶을 끝내 선택한다. 걸어온 길에서의 선택이 만든 지금의 삶과 거기서 얻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포기하지않기로 한 결단이다.

살면서 했던 아쉬운 선택들을 생각하면 종종 후회스러울 때도 있다. 그 때 이거 말고 그걸 했으면 어땠을까. 또한 살아가면서 자랑스럽고 사랑스럽고 감동스러운 순간들은 잠깐이고, 환멸나는 순간들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견뎌야 하는 추위와 더위와 빨래와 청소와 교통체증과 지옥철, 카드값과 숙취와 타인의 사소하거나 거대한 적의.



살다보면 자주 Everything Bagle 같은 블랙홀에 몸을 던져버리고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허무에 휩싸일 때도 있다. 그런데 또 그럴 때마다 한 줌의 다정한 시간들이 애써 오늘을 살아가게 하고, 그렇게 간신히 간신히 삶을 이어가면서 무수한 갈림길에서 여러 선택을 함으로써 점점 고유한 자신이 되어간다.



검색하다 줏은건데 이 해석 미쳤다!




#다정은 나의 힘

이블린은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연인과 함께 고향을 떠나온 이민자다. 가정을 꾸리고 새로운 땅에 적응해 살아 오느라 언제나 전전긍긍해왔고, 거칠고 단단하고 엄격해졌다. 반면 웨이먼드는 자신들에게 고압적으로 구는 세무공무원에게도 스마일모양 쿠키를 갖다주고, 세탁소 지폐교환기가 동전을 먹었다고 항의하는 고객과 같이 춤을 추는 다정한 사람이다. 어찌보면 참 실없고도 대책없다. 그러나 친절과 다정도 그가 자기를 지켜온 나름의 방식이었다.




얼마전에 본 스토리텔링 책에서 세상에 독창적이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읽었다. 쉽게 파악될 수 있는 명확한 하이콘셉트(신선한 소재와 영원한 주제!)가 있어야 높은 확률로 재미있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


멀티버스나 아시아계 이민자 가족의 세대갈등과 봉합이라는 소재 자체가 그리 신선한 것은 아니지만, 엉뚱하고 엽기적인 행동(jumping pad)을 활용한 다중우주간 이동(verse jumping)은 충분히 웃기고 신선했고, 가장 가까운 타인인 가족에 대한 사랑과 이해, 이웃에 대한 다정과 친절이라는 주제는 자칫 당위적이고 진부해보일지 모르지만 역시 영원한 주제가 영원한 데는 이유가 있다는 걸 알게 한다. 재관람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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