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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물고기 Dec 07. 2022

사랑하는, 증오하는 당신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2021)》, 김세인



11월의 영화 EEAAO에서는 갈등하는 모녀 이블린과 조이가 등장한다. 모녀의 갈등은 온 우주를 위기로 몰아넣게 되지만, 이민자 가정의 세대 갈등은 특별히 보편성을 벗어난 것은 아니다. 또한 확실히 이블린은 조이를 사랑한다. 조이는 거대한 악의 화신인 '조부 투파키'이니 지금 죽여야만 한다면서 아버지가 이블린에게 칼을 쥐어주었을 때에 이블린은 마치 이삭을 번제물로 바쳐야 하는 아브라함과 같은 모습으로 잠깐 갈등하지만, 결국 조이를 죽이지 못하고 조이를 묶어뒀던 테이프만 칼로 끊어주고 만다. 결말 역시 결국 모녀의 갈등이 봉합되면서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그러나 12월의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의 모녀 수경과 이정의 갈등은 파국으로 시작해서 돌이키기 어려운 악화일로를 걷는다. 둘의 관계는 관객에게 당혹감을 준다.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사람들이 모녀관계에서 기대하는 일정한 모습이 있을 것인데, 이 모녀는 확실히 '아웃라이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래도 피는 물보다 진하고 가족은 결국 가족'이라는 모두를 편안하게 하는 메시지를 전하며 모녀를 서둘러 화해시키려 하지 않는다.





도입부에서 딸 이정은 속옷 빨래를 하고 있다. 약속이 있는지 즐겁게 통화를 하고 있는 엄마 수경은 입던 속옷을 딸에게 던져주고, 이정이 빨고 있던 젖은 속옷을 건네받아 입고 나간다. 이 모녀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수경은 평소에도 밥먹듯이 이정에게 온갖 폭언과 하대를 한다. 그러고 나서 곧장 연애질에 여념이 없는 이 사람에게 혐오감을 느끼지 않기란 쉽지 않다.




어느 날 같이 마트에 갔다가 차 안에서 수경은 이정에게 마구 손찌검을 한다. 참다못한 이정이 차 밖으로 나가는데, 수경은 그대로 차를 몰아서 딸을 들이받아버린다. 수경은 차가 급발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정은 엄마가 자기를 죽이려고 그랬다는 것을 확신한다. 사고를 둘러싸고 자동차 회사와 수경 사이에서 재판까지 진행되는데, 도입부에 등장한 이 사고가 영화의 메인 사건이 된다.

닮았다고 말하면 둘 다 억울해하겠지만, 둘은 닮았다. 감독이 의도한 장면인지 모르겠지만,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서 컵에 따르지 않고 곧장 입을 대고 마시는 나쁜 습관까지도 닮았다. 나의 일부로 만들어진 저 여자를, 나의 일부를 만든 저 여자를 증오해서 상대를 닮은 자신의 부분이 혐오스러울 때에도 그 부분만 나 자신에게서 똑 떼어내서 분리해버릴 수 없는 지독한 관계인 것이다.




수경이 자신의 히스테리에 대해서 엄마가 밖에서 힘들어서 그렇구나, 하고 좀 이해하면 안 되냐고 말하자 울컥한 이정은 엄마, 그러면 나는? 나는 누가 이해해줘? 하고 묻는다. 수경은 대답한다. "그럼 너도 딸 낳아." 이렇게 빌 테니까 한 번만 나한테 사과해달라고 애원하는 이정에게 수경은 대답한다. "젖 줄까? 넌 왜 자라질 않니."

각 사람의 일생에 주어진 애정의 총량이 일정해서 유년기에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사람도 자라서는 받지 못했던 만큼의 사랑을 어딘가에서 채워 받을 수 있다면 덜 슬프고 덜 억울하고 공평하게 느껴지련만, 슬프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정은 자신에게 약간의 호의를 보여준 직장동료 소희에게 터무니없을 정도로 집착하고, 그 정도 관계에서 적당히 기대되는 정도 이상의 친밀감을 갈구하다 결국 선을 넘는다.





결말부의 정전 신에서  "엄마, 나 사랑해?"라고 이정이 묻자, 수경은 대답하지 않고 소리 내어 웃고 만다. 그리고 날이 밝기 전에 이정은 비로소 수경과 둘이 살던 집을 나온다. 이십 대 후반까지 엄마와 같은 속옷을 입던 이정은 비로소 속옷 가게에 가서 처음으로 자기 몸에 맞는 속옷을 사기 위해서 사이즈를 재고, 자기만을 위한 속옷을 고른다. 이십 대 후반에야 비로소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속옷'을 얻게 된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최은영 작가의 최근 단편집 <애쓰지 않아도>의 마지막 단편 <무급휴가>가 떠올랐다. 미리와 현주라는 두 단짝 친구가 주인공이다.



넌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 그건 마법의 문장이었다.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마음속에 서러움이 얼마나 쌓여 있는지 너처럼 유복한 생활을 하는 애는 절대 알 수 없다. 어머니에게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 미리가 밥을 먹을 때,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잠에서 깨어날 때 미리를 골똘히 지켜보던 어머니의 눈빛이 있었다. 어쩌면 다정하게까지 들릴 수 있는 말투로 어머니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누가 너 같은 애를 좋아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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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는 어머니의 말투, 표정, 몸짓에서 자식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는 그 당연한 진실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주인의 식탁 밑에서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개처럼 노력했다.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작은 증거라도 찾으면 그 자그마한 것을 잡고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렇게라도 그런 믿음의 공동체에 속하고 싶었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말하는 어머니의 사랑조차 받지 못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 태도가 습관이 되어서 그녀는 사람들의 말투나 표정에 민감한 어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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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를 사랑하지 않기로 결정한 건 어머니의 자유의지였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에게는 어머니만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삶은 어머니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미리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미리는 어머니를 두려워하고 혐오하고 때로는 어머니가 죽기를 바라면서도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 삶은 선택할 수 없었다

- 최은영, <무급휴가>



미리의 어머니도 수경 같은 사람이었다. 제대로 된 친구 하나 없다는 이정과는 달리, 그래도 미리에게는 현주가 있었다.



현주는 미리에게 밀려들었고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은 사실상 부당할 정도로 과분한 것이었다. 그래서 미리는 현주가 어렵기도 했다. 미리에게 관계란 매 순간 상대의 시선으로 자신을 심판하며 최대한 자기 자신의 황폐함을 철저하게 감춰야 하는 노동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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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는 현주를 만나고 나서야 사랑은 엄연히 드러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랑은 애써 증거를 찾아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노동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심연 깊은 곳으로 내려가 네발로 기면서 어둠 속에서 두려워하는 일도,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어렵게 받을 수 있는 보상도 아니었다. 사랑은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 최은영, < 무급휴가>



그런 현주에게조차 엄마와의 관계를 털어놓자 '표현 방식이 다를 수 있어도 자식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는 말을 듣고는 미리는 벽을 느낀다. 그리고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작은 증거라도 찾으면 그 자그마한 것을 잡고 큰 의미를 부여했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말하는 어머니의 사랑조차 받지 못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튜브에서 이 영화의 트레일러를 봤는데 슬픈 댓글들이 참 많았다. 어떤 사람은 이게 픽션이고 과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럽고, 자기 부모와 너무 비슷해서 PTSD가 온다고 했다. '자식 사랑하지 않는 부모 없다' 따위의 말을 아무데서나 함부로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모란 자식을 목숨보다 사랑하는(사랑해야 하는) 존재라는 인류 보편의 윤리에 딴지를 거는 작품은 종종 있다. 예컨대 <케빈에 대하여>도 그렇다. 낳아는 놨는데 도무지 사랑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 입장에서도 나름대로 미칠 노릇일 것이라 누구의 잘못이라고 제삼자가 판단할 수는 없지만, 대개 자식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부모의 선택으로 세상에 던져진다. 그리고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로 결정하더라도 부모의 애정을 갈구하기를 멈추지 못한다.


끔찍한 신체적 학대 끝에 아이가 죽으면 언론에 보도되고 공분을 산다. 슬프게도 그런 정도의 일도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데, 정신적 학대까지 포함하면 죽지 않고 살아남아 어른이 된 학대의 생존자들은 당연히 그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이정이 이십 대 후반임에도 외모나 행동이 나이에 비해 미숙해 보이는 것도 일종의 정서적 영양실조로 충분히 자라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설정인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이유 중의 하나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다. 언젠가 수경 같은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만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작품은 부모가 되는 일의 무게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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