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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물고기 Jun 11. 2023

넌 중요하지 않아. 그러니 너 좋은 대로 살아.

룰루 밀러,《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좋은 책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의식하면 종종 마음이 다급해진다. 좋은 책들만 읽기에도 삶은 너무 짧고 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죽어간 나무에게 사죄해야 마땅할 것 같은 책들 역시도 너무나 많고, 그래서 좋은 책을 잘 고르는 것부터가 하나의 과제가 된다. (울림을 주는 책을 만나는 운 좋은 경험을 자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그런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인용하거나 추천하는 책이 있는데, 그런 책을 고르면 대체로 타율이 좋았다.)《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저것 많이 읽기보다 읽었던 책을 되새김질하는 것이 독서에서 더 중요한 습관이라는 것을, 그래서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제대로 못할 거면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게으른 성격 탓에, 어떤 책이 왜 그렇게 좋았는지를 공들여 표현하는 것도 미루어왔다.


밀리의 서재를 구독하면서 출퇴근길에 책을 자주 읽고 있다. 그러면서 하이라이트와 북마크를 해둔 부분이 꽤 많지만 왜 그 부분을 기록하고싶었는지, 어째서 나한테 울림을 줬는지에 대해서 슬슬 정리하고 있다.




요즘 <물고기를 존재하지 않는다>를 성우가 읽어주는 오디오북으로 다시 듣고 있는데, 아름다운 성우의 목소리로 들어서 그런지 책의 후반부는 다시 들으니 더욱 꿈결같다.

 
저자인 룰루 밀러는 개인적인 삶의 좌절을 겪고 그에 대한 돌파구가 되어주리라는 기대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어떤 과학자의 일생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세상에 밝혀진 물고기 5분의 1을 발견하고 이름붙여 분류한 그의 업적과 질서와 범주에 대한 집착이 불러온 폭력에 대해 알게 되고, 결국 '어류'라는 견고한 진화적 범주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에 직면한다. 그렇게 한 과학자의 전기는 저자가 그 충격적인 앎으로부터 얻게 된 삶의 통찰과 그 이후 그녀의 삶과 일생의 사랑을 만난 이야기에 대한 회고록으로 (물고기처럼) 유려하게 연결된다.





이 책에서 대립하는 두 가지 개념은 '질서'와 '혼돈'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질서의 화신이다. 그는 수많은 물고기를 채집하고 분류했고,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라는 '혼돈'으로 모두 깨져버린 물고기 표본을 하나하나 건져 피부에 꿰매 붙이는 통제광 같은 결기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결국 우생학을 지지하게 된 것도 어쩐지 그럴듯하다.)


새로운 바이러스든, 미확인 비행물체든, 사람이든, 여타의 생명체든 나의 통제를 벗어난 미지의 타자는 공포와 경계의 대상이고, 혼돈 그 자체이다. 각자의 존재를 떠맡고 세계 속에 던져진 인간은 질서를 세우고 될 수 있는 한 예측가능한 삶을 살아보려고 분투하지만, 대지진처럼 날벼락같이 한 순간에 질서를 무너뜨리는 혼돈은 삶의 내재적인 가능성으로 언제나 몸을 숨기고 있다.


혼돈과 혼돈으로부터 오는 불안은 도피의 대상이다. 어떤 것에 이름 붙인 후에는 더이상 생각하지 않는 것도, 많은 사람들이 가본 길로만 가는 것도 혼돈과 불안을 최소화하려는 그나마 안전한 선택이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질서를 무너뜨리고 마는 혼돈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을 때, 종종 사람도 겁먹은 개만큼이나 크게 짖는다.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가 가져 마땅한 미치광이들이 생겨난다."
-Roy Porter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믿음을 거부해야 마땅한) 과학자인 데이비드가 도덕과 이성과 반증의 파도를 끝내 외면하고 위계와 질서의 사다리에 집착했던 이유는 자신의 존재는 점 위의 점 위의 점에 불과하다는 불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통제하고 질서를 부여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넌 중요하지 않아"라는 말은 아버지의 모든 걸음, 베어 무는 모든 것에 연료를 공급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너 좋은 대로 살아."아버지는 수년동안 오토바이를 몰고, 엄청난 양의 맥주를 마시고, 물에 들어가는 게 가능할 때마다 큰 배로 풍덩 수면을 치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게걸스러운 자신의 쾌락주의에 한계를 설정하는 자기만의 도덕률을 세우고 또 지키고자 자신에게 단 하나의 거짓말만을 허용했다. 그 도덕률은 "다른 사람들도 중요하지 않기는 매한가지지만, 그들에게는 그들이 중요한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가라"는 것이었다.
(...)암울한 현실일 수도 있는 것들이 아버지에게는 오히려 인생에 활력을 가득 불어넣고, 아버지가 크고 대범하게 살도록 만들었다. 나는 평생 광대 신발을 신은 허무주의자 같은 아버지의 발자국을 따라 걸으려 노력해왔다. 우리의 무의미함을 직시하고, 그런 무의미함 때문에 오히려 행복을 향해 뒤뚱뒤뚱 나아가려고 말이다.
하지만 내가 항상 그런 일을 잘했던 건 아니다. 너는 중요하지 않아는 내게 종종 아버지와는 다른 효과를 냈다.
(...)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마시라. 카뮈는 그것이 언제나 우리 대다수의 마음속에 있을 거라고 여겼다. 고통에 대한 그 처방이 어찌나 유혹적인지 18세기 시인 윌리엄 쿠퍼는 그것을 "거대한 유혹"이라고 표현했다.


저자는 물고기의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많은 사람들의 직관이 포기하지 못했던 질서와 경계가 허물어진 그 곳에서 마침내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희망을 얻는다. 자신이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거나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라, 파괴외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이므로. 그녀는 혼돈으로부터 될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도피하면서 질서를 다시 세우는 데 몰두하는 대신 혼돈을 직면하는 길을 선택했고, 마침내 그로써 경이로움의 세계로 진입한다.




생물학자 애인을 두면 온갖 생물에 대한 재미있는 사실들을 알게 된다(버섯이 식물보다는 인간과 더 가깝다는 사실도 그가 말해주었다). 서당개 노릇을 한지 여러 해가 지난 터라 비늘이라는 외피를 갖고 물속에서 헤엄치는 생물 중 다수는 자기들끼리보다는 포유류와 진화적으로 더 가까운 관계라는 사실, 생물 범주로서의 '어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렇게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다만, 그래서 우리는 중요한가 중요하지 않은가? 신이 있는 세계에서 나와 이웃은 중요한 존재라고 가르침 받는다. 그러나 요즘의 나는 '나도 타인도 우주의 먼지에 불과하지만, 타인에게는 그들이 중요한 것처럼 대하는' 광대 신발을 신은 허무주의자의 도덕률에 더 마음이 기운다. 인생에 내가 찾지 못한 중요한 사명이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더 쉽게 죄책감을 느끼고, 더 많이 고민하고, 더 심각하게 살아 왔나 싶어서 그렇다. 비장함과 즐거움이 양립하는 삶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Just be a rock.


에에올이 생각나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 사소하고, 어리석고, 전에도 틀렸고 앞으로도 틀릴 것이다. 지금 지구에 살아 숨쉬고 있는 모든 사람은 서로를 얼마나 간절히 사랑하든 얼마나 격렬히 증오하든 언젠가 반드시 전부 소멸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를 중요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어떤 질서의 사다리에서 각자가 차지하는 위치가 아니라, 서로 가라앉지 않도록 띄워주는 유일무이하고 다정한 그물망이라는 주제의식이 비슷하다.


지금의 세상이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서로를 중요한 존재라고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게도 여전히 진정한 환대를 할 힘과 다정한 그물망에 대한 희망이 어디엔가 남아있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인지 이 책의 많은 부분에 하이라이트를 하면서 경이로운 마음으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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