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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성대 Mar 20. 2016

'난 여기서 그냥 만족할래'의 오류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꿈을 접은 한 청년의 삶을 돌아다보며.

 아끼는 후배 한 명이 자신이 오랫동안 가고자 했던 길을 집에서의 압박, 경제적 자립 앞에서의 좌절, 하루하루 먹어가는 나이 등 현실적인 이유로 포기한다 하며 내게 말했다.


'형, 저는 그냥 여기서 만족할래요.'


그 뜨거웠던 열정을 눈감고 접을 수밖에 없는 후배의 처지에 마음이 아팠다. 이 후배를 더 일찍 만나서, 또는 내 역량을 더 키워서 자신의 꿈을 더 키우고 현실 속에서 실현할 수 있도록 지지하고 도와줄 수 없었던 것에 자책 비슷한 아픔이 밀려왔다. 스스로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 귀한 시대에, 하고자 하는 것이 명확했던 후배가 그 이상을 접을 수밖에 없게 만든 뿌리 깊은 사회구조적 문제가 한번 더 내 마음을 깊게 찔러왔다. 그 결정에 후배 개인의 잘못은 없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것을 할 수 있다고 실현가능한 상상을 하지 못하게 만든 우리 사회의 책임이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자꾸 나를 불편하게 했던 말이 있었다.


'형, 저는 그냥 여기서 만족할래요.'


'만족'에 '그냥'이라는 단어가 붙을 때, 무언가 참고 넘길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다. 네이버 사전의 입을 빌리면 '만족'은 무언가가 마음에 흡족하거나 모자람이 없이 충분하고 넉넉할 때 쓰는 말이다.  함께 언급된 '그냥'은 '더 이상의 변화 없이 그 상태 그대로'라는 뜻이다. 이대로 해석하자면 '난 여기서 그냥 만족할래'는 '난 여기서 더 이상의 변화 없이 이 상태 그대로 흡족할래'라는 뜻이다.


 그러나 만족은 만족한다고 말하고 또는 인정하리라 다짐한다고 해서 만족한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만족은 선언적 말로써 시작되어 인정되는 것이 아니다. 만족은 내 삶 전체의 과정에서 쌓아온 경험과 그 속의 감정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만들어진 각자의 인생관이 스스로의 생각과 몸을 빌어 현재를 느끼고 표현해 내는 결과로써 진정으로 표현되고 인정되는 것이다. 내 마음이 만족스럽지 않은데 말로 만족한다고 이야기한다 한들 그것이 진짜 만족으로 받아들여질까?


 한 청년이 있고 치자. 그 청년은 음악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따뜻한 삶의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는데, 재능이 없어 보인다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주눅이 들고, 그것으로 먹고살겠냐는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와 이것을 준비하는데 들어갈 돈들이 감당이 안되어 조용히 공무원 시험을 치고 공무원이 되었다. 아직 그 청년 마음속에는 음악에 대한 불씨가 남아있다. 그러나 음악이라는 길을 다시 선택했을 때 감당해야 할 압박을 견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을 거듭하다 결정을 내린다. '난 여기서 그냥 만족할래.' 여기서의 만족이 만족일까? 아니다. 이것은 '체념'이다. 희망을 버리고 아주 단념한 상태이다.


 내가 이 사소한 단어 하나에 딴지를 걸었던 이유는 '만족'이라는 단어의 왜곡된 의미가 만들어내는 무서움 때문이다. '네 삶에, 처지에 만족해라.'라는 이야기가 '그냥 네 분수에 맞게, 지금 딱 살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라'라는 의미로 자신의 가능성과 가치를 끊임없이 찾아가며 지금보다도 더 흡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의 의지와 힘, 그 가능성을 박탈해가기 때문이다. 네 한계를 자각하고 이대로를 받아들이라는 '체념'이 '만족'이라는 단어의 모습을 빌어 계속 쓰인다면, 사람들은 스스로 만족한다고 생각하는 삶 속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면서 그 불일치에서 오는 고통을 회복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반복하며 되새기게 된다.


 만족이 체념의 수동적 의미를 갖게 되었을 때, 그 의식에 지배당하는 사람들이 다시 회복하기 어려운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수동적으로 '만족'을 강요당한 사람들은 대체로 만족의 기준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원하지 않는 삶에 체념하면서부터, 진짜 내 삶의 행복을 위한 만족 지점을 찾는 노력을 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 방법을 서서히 잊어가게 되고 결국엔 목표 없이 하루하루를 버텨가는 삶을 살게 된다.


 그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만족의 기준은 자기 자신이 아닌, 사회와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강요하는 기준들로 채워진다. 그것들은 주로 부와 명예, 권력 등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주로 소유욕에 기반하고 있다. 소유를 위한 소유욕에는 끝이 없다. 하지만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그래서 끊임없는 소유욕은 현실적이지 않다.  물론 소유욕에도 끝은 생길 수 있다. 그 끝은 개인들이 가치관, 행복에 대한 내적 기준을 끊임없이 찾고 갖추는 노력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 하지만 '체념'한 삶, 버티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능동적인 삶을 살기 위한 동력을 잃어 그 기준을 스스로 찾아내기 힘들다. 그래서 많이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매스컴을 통해 나오는 성공한 소수의 사람들의 사례를 나의 사례와 비교하며, 마치 나만 저렇게 가지지 못한 것 같아 괴로워한다. 또 주변 사람들이 잘되면 입바른 축하는 전하지만 괜스레 배 아파하고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가진 자들도 더 가지지 못해 힘들고, 가진 것은 어떤 식으로든 다시 빠져나가기에 그것을 완벽히 지키지 못하는 스트레스에 괴롭게 된다. 그 속에서 나와 나의 관계, 내 삶이 조금씩 균형을 잃고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모두 소리 소문 없이 묻히거나 반대로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만족하는 삶을 다시 찾기가 정말 어렵다.


 사람들은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 맺음 속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시도하고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자신의 미션을 찾아 만들어가고,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그대로 자각하고 그 모습을 절대적으로, 또 건강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 받아들임은 체념이 아닌, 시간이 지나면서 더 개선되고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받아들임이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을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만족의 지점은 미래가 아닌 현재의 시간으로 당겨져 오게 되고, 비로소 현재의 삶에 건강하게 만족할 수 있게 된다. 아쉽게도 대한민국의 현실은 청년들에게 만족의 지점을 찾을 시간과 상상력을 확보해 주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청년들이 취업의 문턱을 넘어, 사회생활에 나름대로 정착하고서도 정신적으로 피폐하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다.


 명확히 하자. 만족은 체념이 아니다. 수동적인 체념을 만족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그 의미가 청년들의 의식을 지배하기 시작한다면, 청년들이 가질 행복한 삶은 점점 더 멀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다짐하자. 체념의 뜻을 만족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지 말자. 그리고 진짜 만족 찾기에 갈급하자. 그 의지가 살아난다면 아직 세상엔 당신, 청년들을 도울 사람들이 많다. 내 지금의 처지가 어떻든, 내 나이가 어떻든 간에 언제든지 그들과 함께 삶의 만족을 반드시, 다시 찾을 수 있다. 내 자신도 그랬기에.



PS. 꿈을 접은 후배에게.. 스스로 책임지겠다 한 삶을 살다가 참지 못할 힘듬에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찾아왔으면 해. 늘 너를 위한 것들을 염두해두며 준비하고 있을테니까 :)


 그리고 누군가 나의 이런 생각에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해 주었다. 공무원해도 먹고 살기 힘든 이때에 음악같은, 돈도 안되는 것을 하게 부추겨놓고 나중에 잘 안되면 어떻게 책임을 지려고 하느냐 라고 말이다. 나는 말해주고 싶다. 당신의 성공이나 만족의 기준이 다른 이들의 성공이나 만족의 기준과 완벽히 일치할 수 없다고 말이다. 돈많은 삶이 최고의 성공이라고 한다면 몇몇 재벌총수들, 그리고 우리 주변의 벼락 부자들이 틈틈히 보이고 있는 사회적 문제야기와 가족간 형제간 갈등 속에서 파멸하거나 목숨을 버리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행복해야 하니까.

 사람마다 성공과 만족의 기준은 다르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 행복과 만족의 기준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불행과 아픔일 수 도 있음을 절대 잊지말고, 조언을 하려거든 반드시 물어보자. 너의 성공과 만족의 기준은 무어냐고 말이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조언에 마찬가지로 책임을 질 수 있는지도 생각해보자.

 그리고 사람들은 평범한 삶을 살고 싶을 수도 있는데 그들에게 굳이 성공을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성공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성공할 수 있느냐 보다 만족할 수 있느냐를 이야기한다. 평범한 삶이 무언가? 모두가 그리는 평범한 삶은 대학교까지 잘 졸업해서 취직하고 결혼해서 애 낳고 아프지 않고 소박하게 잘 사는것 일 것이다. 되묻고 싶다. 정말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저 과정들이 쉽게 해결되고 이루어질까? 실제 삶은 박봉에 대학교 등록금 빛을 갚아나가고, 어렵게 대출받아 결혼하고(결혼을 제 시기에 잘 하면 다행이다) 아이 낳아 뼈빠지게 양육비 대기위해 야근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갈 것이다. 그게 평범한 삶이다. 대다수 우리나라 국민들이 겪고 있는 평범한 삶이다. 지금보다 더 치열하게 살지 않으면 당신들이 이야기하는 평범한 삶은 힘들 것이다. 이런 삶에 만족할 수 있다면 나는 그런 삶을 살아도 된다라고 말하고 싶다. 당신은 어떤 삶을 선택하고 싶은가? 사회적 성공은 필요없다.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처한 상황에서 당신은 소소한 행복과 만족의 기준들로 삶의 힘든 부분들을 채워넣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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