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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성대 Dec 18. 2016

관점. 책만 보고 사는 사람들이 맞이할 수 있는 위험

다양한 현실에서의 경험, 통찰 없이 공상으로 찬 생각이 가져다주는 허무

우리는 다양한 목적을 위해 책을 읽는다.

부족한 지식과 관점을 얻기도 하고

내가 보고 느끼지 못한 세상을 다른 이의 눈으로 이해하고 싶어 책을 보기도 한다.

실제 우리는 책에서 많은 지식, 지혜를 얻는다.


문제는 이 다음에 나타난다. 내가 본 문제들은 크게 두가지이다.

1.스스로가 보고 경험한 현실의 구체적 모습 및 다양한 실제 사례들과 거기서 나온 통찰이 들어있지 않은 추상적인 고민, 다른 누군가의 관점 그대로를 맹신하며 바라본 자신의 모습에서 나온 고민들은 실체가 없는 공상의 적을 만든다. 그러한 문제들은 해결을 해도 그것이 맞는지 검증이 되지 않는 문제 안에 스스로를 몰아넣어 끊임없이 자신을 불안하게 만든다.

2.나와 세상이 가진 구체적 문제와 그에 대한 해결에 대한 관심이 없는 상태, 뚜렷한 목표의식 없이 오로지 자기 비판적으로 책만 많이 읽는 경우 나와 세상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것의 범위가 무한대로 늘어나며 작은 고민 하나가 해결이 된다해도 결국 그것과 이어지는 다른 고민이 나타나버려 삶에 대한 고민을 하고 해결하는 과정 모두를 허무하게 만들어버리게 된다.

3.이런 고민들과 생각들은 사람들의 삶을 만족스럽게 하기보다 풀리지 않는 불안과 함께 제자리에서 맴돌게 만들며 스스로의 감정을 고통속에서 소모하게 만든다.  



실체가 없는 추상, 공상이 만들어낸 끊임없는 불안


우리는 책을 읽으며 많은 것을 알기도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그 속에서 자기자신의 부족함, 무능력함을 알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불안해하거나 슬픔에 빠지기도 한다. 나는 왜 그럴까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거나 적어도 왜 그런지에 대해 규정하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 고민이 끝없이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내가 분해되어 없어져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몇몇 마음 먹은 이들은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력함을 더 제대로 파악하고 명확하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

또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려고 한다.


그 첫번째 노력으로 처음 보는 관점으로 스스로의 모습을 계속해서 바라보려고 하는데

그때 자신의 모습은 대개 구체적이기보다 두루뭉술하고 부정확해 보일 것이다.

누구나 처음 사용하는 무언가를 능숙하게 다루기는 힘들다.

그러기에 나타나는 모호함과 불안함은 커지게 되고 그것은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기 위한 노력으로 변한다.

내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의 관점을 자신에게 비추어 보며 막연함 속에서도 치열하게 고민하여 자신의 모습에 대해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려간다.


이 때 이 고민의 근거와 예시, 그것을 토대로 내려진 결론이 얼마나 현실적인지에 대한 문제가 생긴다.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받는 책의 내용들은 대개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과 그것이 세상에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지를 작가의 삶과 주변인들의 삶을 관찰하며 검증되었기 때문에 보편적인 공감을 받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을 읽고 자신의 사고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이 타인과 함께 해본 다양한 경험(갈등과 합의의 경험 등), 그 속에서 관찰하고 발견하는 실제 삶의 모습과 통찰들이 부족한 상태에서 책에서 얻는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면 상상에서 만들어낸 예시들과 추측들로 고민의 기초가 만들어져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고민의 토대가 그렇다면 거기서 만들어진 고민과 그 해결책들도 현실과 동떨어진 공상에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 그런 고민들은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고 해도 그 고민에 확신을 가지기 힘들다. 판단의 기준이 오로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추상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 기준을 또 검증해야 하는데 삶에 다양한 경험이 없다면 그것을 비추어 검증해 볼 기회가 적어 검증이 충분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 결국 다시 불안해진다.



뚜렷한 목표 의식 없이 '그저 나를 알고 싶어'서 보는 책은 풀어도 풀리지 않는 무한대의 문제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나와 타인, 세상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보는 책과 거기서 얻은 통찰들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정의하는데 주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자신의 모습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대개 사람의 자기 인식과 규정은 다른 사람들과의 삶 속에서 가능하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늘 풀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풀어야 한다. 같이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절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독립된 삶도 타인이 있기에 가능한 이야기이다. 세상에 나 혼자 있으면 독립이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문제가 있고 그것에는 어느정도의 실체가 있다. 자신을 알고 싶다고 하는 것에 타인에 대한 존재와 관계의 문제가 빠질 수는 없다. 

 그런데 플어야 되는 관계의 문제에서 시작한 고민이지만 거기서 얻은 통찰이 그 문제 해결에 쓰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규정하는 데에만 활용된다고 하면 슬픈 일이 벌어진다. 책에서 얻은 통찰을 활용할때 특정한 문제해결에 집중되지 않으면 고민의 적용 범위가 매우 넓어지게 되고 무한대에 가까운 자기 문제 발견하게 된다. 딱히 목표의식이 없기 때문에 문제를 풀 동기도 잘 생기지 않거니와 불안감과 불만족감에 문제 하나를 어찌저찌 푼다고 해도 그것에 이어 또다른 문제가 생긴다. 문제 해결에 끝이 보이지 않는다. 왜 사나 싶고 삶은 허무해 보인다.



삶은 허무한 것이고, 불안한 것이다. 이렇게 사는게 잘못되었나?


 이 문제들을 지적하면서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현실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공상과 상상으로 내가 힘들고 불안할 수는 있는데 이 문제들을 꼭 풀어야 하나? 이렇게 살면 안되나?

 개인의 삶은 개인의 문제이니 어찌 살든 상관없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사람은 혼자 살아가지 않는다. 함께 살아간다. 그리고 행복과 불행은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해지고 영향을 미친다. 그게 함께 살아가는 서로가 감당가능하다 합의된다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생긴다. 적어도 그들의 고통이 느껴진다면 적어도 그것을 감당가능한 정도로 만들어가는 배려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러한 노력은 불안함과 허무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당사자 혼자서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가 함께 조율해 나가야 하는 문제이다.



막 쓴 글의 결론

 나와 타인이 함께 엮인 우리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현실의 다양한 실제 사례에 기반한 문제로 나와 우리에 대한 고민을 하자.

 나은 삶을 위해 고민을 하지만 계속해서 고민이 풀리지 않고 스스로가 힘들어진다면 공상과 상상으로 가득찬 고민을 하기보다 실체가 있는 고민을 하자.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할 고민들을 하고 그 속에서 나의 모습을 찾아나가고 내 모습들을 다양하게 규정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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