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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자 C Aug 28. 2024

가혹한 운명에 대항하는 숭고한 인간들의 슬픈 초상

김영하, 『검은 꽃』

   김영하 작가는 소설, 에세이, 뉴스레터, 예능까지 다방면에 재능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의 박학다식과 조곤조곤하면서도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말투, 간결하지만 날카로운 흡인력 있는 문체는 정말 닮고 싶은 부분입니다. 김영하 작가의 책을 여럿 읽었지만, 작가 본인이 밝혔듯 그의 작품 중 하나만을 읽어야 한다면 저는 망설이지 않고 『검은 꽃』을 추천합니다. 2003년 출간되었으니 벌써 21주년이 되었네요. 이 소설을 처음 읽었던 건 10여 년이 되었지만, 그때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작가가 이 소설에 자신의 모든 재능과 에너지를 갈아 넣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만큼 흡인력 있는, 새로운, 의미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검은 꽃』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인물의 수만큼 많은 사건이 발생하는데 사건의 순행적 전개보다는 당장 전개되는 사건 하나하나에 종횡으로 얽혀 있는 인물과 사건들을 퍼즐 조각처럼 하나씩 배열해 전체의 그림을 파악해 가는 재미가 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시작된 이 소설은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는 조선 역사와 남북전쟁, 하와이·멕시코의 대농장, 1910∼1917년에 걸쳐 일어난 멕시코 혁명을 교차시킵니다. 당시 동아시아 정세에도 어두웠던 조선에서 살아 남기 위해 지구 반대편까지 떠난 이들이 있었다는 것이 놀라운 충격이었습니다. 현실의 삶이 너무도 절망적이기에 가능했던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이 책에는 당시 역사를 작가가 간략하게 요약한 부분이 몇 군데 등장하는데, 역사가들의 서술처럼 팩트를 중심으로 간결하게 서술했지만, 이미지를 중심으로 서술한 점이 달랐습니다. 이런 방식이 오히려 당시 상황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일본의 압력으로 상투까지 자른 왕은 그해 일본과 아버지가 보낸 자객에게 왕후까지 잃었다. 난자당한 그녀의 시체에 일본 낭인들은 불을 질렀다. 어려서부터 기른 머리와 오래도록 함께 지낸 아내를 한꺼번에 잃은 왕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재기를 도모했지만 무위에 그쳤다. 몇 년 후 왕국은 제국이 되고 왕은 황제가 되었으나 그에겐 힘이 없었다.
개항 이후 제물포는 서양과 일본, 중국의 새로운 문물이 밀려 들어오는 분주한 항구로 변모하였다.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로 된 간판들이 이곳이 조선 제일의 국제항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봄 햇살이 눈부셨지만 여인들은 땅을 보고 걸었다. 착검한 소총을 들고 경계를 서는 검은 제복의 일본 군인들이 곁눈으로 여인들의 행진을 훔쳐보았다."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구성을 통해서도 당시의 역사를 충분히 조망해 볼 수 있습니다. 배교한 신부와 박수무당, 도둑과 왕실종친 일가, 몰락한 역관과 가난하지만 새로운 삶을 갈망하는 소년, 퇴역 군인들에 이르기까지 조선 말기의 인물 군상들을 다채롭게 펼쳐놓고 그들을 일포드 호의 승객이라는 공통분모로 엮어냅니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삶을 살고 있었지만 혼란하고 무능한 나라 때문에, 혹은 어쩌다보니 망가져 있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삶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상태였죠. 절망 속에서 그들이 택한 것은 미지의 땅이었습니다. 어디라도 여기보다는 나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게 만든 것입니다.


   미지의 땅으로 떠나기 위해 올라탄 일포드 호에서의 생활도 이 소설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돼지우리와도 같은 선실에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굶주림과 냄새, 멀미와 질병들을 견뎌가며 오랜 기간 항해하는 장면들은 읽는 내내 온 신경을 자극합니다. 마치 김훈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힘없는 나라에서 탐욕스러운 농장주들에게 팔려가는 백성들은 작가의 표현대로 "머릿수가 중요하지 족보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헐값에 팔리는 노예에 불과했죠. 나라는 백성들이 이렇게 멀리까지 팔려나가는 동안 그저 치욕을 견디는 일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외부 대신 윤치호가 하와이까지 방문했다가 자금이 모자라 멕시코에 가지 못하고 귀국하는 장면도 있었는데, 계몽주의자에 가까웠던 젊은 관리는 이역만리에서 열악한 환경, 부당한 대우를 받는 동포들에게 근면과 성실을 부르짖는 연설을 합니다. 작가는 이 대목을 두고 농장주가 고용한 사람 같았다고 표현했습니다. 자국민들의 권리를 보호하기보다 농장주들의 마차를 타고 나타나 주는 것도 없이 잔소리만 해대는  관리의 모습은 그 시대 우리나라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나마 여비가 부족해 멕시코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돌아오는 장면에서는 당시 힘없는 조선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연수와 이정의 사랑 얘기도 이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인데, 강렬했던 그들의 사랑이 삶의 무게에 묻혀버리는 과정은 사랑마저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힘없는 나라 백성의 처지를 더욱 절망적으로 느끼게 합니다. 그들의 사랑은 이 책에서 그리고 있는 혁명처럼 순수, 배려와 연대의 정신으로 시작했지만 다른 무언가의 수단으로 점차 변질되어 갑니다. 사랑과 혁명조차도 거대한 시대와 운명의 무게를 견디기는 어려웠던 것이죠.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무척 냉소적입니다. 역사와 운명 앞에서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모습조차도 담담하고 차갑게 묘사합니다. 국가와 민족에 대해서는 더욱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이 소설에서 국가나 민족보다 더 강한 것은 자본으로 느껴집니다. 왕실종친이며 미천한 이정과 순수한 사랑에 빠졌던 연수조차도 결국에는 멕시코시티의 고리대금업자를 거쳐 유흥업계의 큰손이 된다는 설정은 서글프기까지 합니다. 작가님, 꼭 이래야만 했나요? 그들에게 사랑은 사치에 불과했던 건가요? 어둡기만 한 결말 속에서 사랑이나 의기(義氣)의 씨앗을 찾아보려고 했으나 이런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들이 세웠던 작고 초라한 나라는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이 책은 끝을 맺습니다.


   비록 절망적인 결말이지만 작가가 발버둥쳐도 소용없다는 식의 메시지를 전하려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지켜내야 할 그 무엇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국가도 민족도 그 무엇도 아닌 인간다움을 위한 투쟁. 그래서 이 소설을 읽으며 『노인과 바다』가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다."


   권위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파멸은 육체적 가치와 관련된 개념이며, 패배는 정신적 가치와 관련된 개념이라 합니다. 굳이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이나 전쟁, 천재지변을 나열하지 않더라도 삶은 무정한 시간에 의해 파멸을 향해 갑니다. 누구나 산산히 부서질 운명에 처해 있죠. 더구나 일생 동안 수고로운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시포스(Sisyphos)의 돌 굴리는 모습이 인간의 삶에 대한 소름 돋는 메타포라는 것을 해가 지날수록 절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정된 파멸을 알면서도 오늘의 돌을 굴려야만 하는 것이 패배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이라는 깨달음도 함께 마음속에 자리잡아 갑니다. 지지부진한 일상, 예상치 못한 불운으로 삶에 대한 애착이 약해질 때가 이 책을 읽기 적당한 때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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