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검은 꽃』
"일본의 압력으로 상투까지 자른 왕은 그해 일본과 아버지가 보낸 자객에게 왕후까지 잃었다. 난자당한 그녀의 시체에 일본 낭인들은 불을 질렀다. 어려서부터 기른 머리와 오래도록 함께 지낸 아내를 한꺼번에 잃은 왕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재기를 도모했지만 무위에 그쳤다. 몇 년 후 왕국은 제국이 되고 왕은 황제가 되었으나 그에겐 힘이 없었다.
개항 이후 제물포는 서양과 일본, 중국의 새로운 문물이 밀려 들어오는 분주한 항구로 변모하였다.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로 된 간판들이 이곳이 조선 제일의 국제항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봄 햇살이 눈부셨지만 여인들은 땅을 보고 걸었다. 착검한 소총을 들고 경계를 서는 검은 제복의 일본 군인들이 곁눈으로 여인들의 행진을 훔쳐보았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