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싱글맨』
언제나 불황인 출판계지만, 최근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고 합니다. 성인 독서율은 언급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의 수준이고 어린이/청소년도 '공부'하느라 독서할 시간이 부족한 현실이니 출판계가 지금까지 소멸되지 않고 있는 것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래도 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읽는 사람만 읽는다는 어두운 현실을 읽을 사람은 읽는다는 기대로 바꾸는 긍정 회로를 가진 이들이기도 합니다. 출판계가 불황인 것에 비해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은 인파로 가득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이런저런 분석이 나오기도 했죠.
출판계 사람들과 술자리에서 가볍게 나눈 분석에 따르면 크게 두 가지 이유를 꼽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실제 독자보다 책 읽는 나의 이미지를 SNS에 전시하기 위해 도서전을 찾는 이들이 늘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현 정부의 홀대 내지는 적대 정책으로 온갖 예산이 삭감된 출판계에 대한 독자들의 연민이 발동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언론과 출판의 주요 역할 중 하나가 무분별한 권력에 대한 견제와 비판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출판계를 좌편향으로 낙인찍고 언론계를 가짜 뉴스라는 간편한 논리로 매도하며 예산 삭감과 납득할 수 없는 인사로 일관하는 현 정부의 태도는 문자 그대로 무지막지(無知莫知)합니다.
출판계에서는 나름의 자구책으로 출판사 직원들이 직접 출연하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기도 하고 SNS 홍보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대형 출판사를 중심으로 북클럽을 운영하며 독서 모임을 활성화하기도 하죠. 이런 상황에서도 가끔 의외의 히트를 치는 책들이 있습니다. 미디어에 노출되는 책들인데요, 유명인이 언급한 책이나 영화나 드라마에 노출된 책, 영화나 드라마의 원작 책 들입니다. 이런 책들 중에는 우연이나 홍보 목적의 노출도 많아 책의 질을 담보할 수 없는 것도 많습니다. 영화나 드라마 원작 책들의 경우도 비슷한데 지난 7월에는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의 대본집이 두 주 정도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기도 했죠. 대본집이 드라마만큼의 만족을 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이 드라마의 팬들에게는 드라마의 감동을 이어갈 수 있는 굿즈로서 기능할 것입니다.
책의 질과 관계없이 미디어에 노출된 책 중심으로 베스트셀러가 되는 현실이 아쉽다는 푸념일 뿐 이런 책을 잘 활용하면 독서의 문턱을 낮출 수 있고, 콘텐츠를 좀 더 다채롭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 원작 도서 중 저의 원픽은 『싱글맨』입니다. 내용상 취향을 탈 수밖에 없는 작품이지만 책과 영화를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싱글맨』은 책보다 콜린 퍼스 주연의 영화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기도 합니다. 연인을 잃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중년 남자의 이야기죠. 당시 구찌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톰 포드가 첫 감독을 맡은 작품으로도 유명합니다. 영화 <싱글맨>은 영상미와 콜린 퍼스의 뛰어난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지만 책의 서사가 주는 감동의 깊이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책이 조금 버겁게 느껴지는 분이라면 영화를 먼저 보시고 책을 읽으면 보다 수월하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책과 영화 중 택1 해야 한다면... 이 작품은 책을 추천합니다.
교통사고로 연인을 잃고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주인공, 조지는 50대의 대학교수입니다. 아침마다 잠에서 깨어 용변을 보고 세수하고 면도하고 머리를 빗고 옷을 다 입을 때쯤 그는 비로소 '조지'가 됩니다. 집안 곳곳에서 연인 짐이 남기고 간 흔적을 느끼며 괴로워하죠. 자신도 짐처럼 "급히 끝날까 두려워"하면서.
학교로 차를 몰고 가는 동안에도 조지는 적개심을 느낍니다. 공원에서 해안을 내려다보는 전망을 가로막는 건설업자, 퀴어에 반대하는 지역신문 편집장, 쿠바를 공격하자는 상원의원, 경찰들, 성직자들… 그들 모두에게 폭력의 처단을 내리고 싶습니다. 그들 모두가 짐의 죽음에 책임이 있기 때문이고, 평화로운 세상을 괴롭히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도착한 그는 서둘러 교수 조지의 가면을 쓰고 연기를 시작합니다. 그는 학생들 속에서도 현기증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가 가면을 쓰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과연 게이라는 성정체성 때문이었을까요? 그가 사람들 사이에서의 나와 진짜 나 사이에서 느끼는 거리가 멀어질수록 현기증을 느끼는 것처럼 지금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모두 저마다의 가면을, 그것도 여러 개 써야 살 수 있는 시대니까요. 멀티 페르소나, 부캐 전성시대라는 말이 제겐 하나의 트렌드로만 느껴지지 않고 왠지 짠한 마음이 듭니다. 진짜 내 자아와 사회적 자아의 거리를 점점 멀어지게 하는 이 사회가 버겁게 느껴집니다.
한편 그는 학생들에게 희망을 상징합니다. 작가는 그와 학생들의 관계를 이렇게 말합니다.
"조지는 다만 거리에서 진짜 다이아몬드를 5달러에 파는 사람과 같을 뿐이다.
바삐 지나가는 대다수는 감히
그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걸음을 멈추지 않을 테니,
다이아몬드를 살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그가 무엇을 파는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파는 물건의 값이 5달러니까 그만큼의 가치만 있을 거라 생각하죠. 진짜 다이아몬드를 5달러에 파는 사람들. 그들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지나치고 있는 것입니다. 필즈상을 수상한 수학자보다 수학 일타강사가 더 부와 영향력을 얻을 수 있는 세상이 우리가 사는 곳의 현실이죠. 잘 산다는 것, 세상을 알아간다는 것이 진짜 다이아몬드를 찾는 일이 아니라 빠르게 변하는 대중의 트렌드를 잘 읽어 내고 영악하게 이를 잘 이용하며, 남을 '함부로' 믿지 않고 손익을 따져 행동해야 하는 일로 생각하고 사는 건 아닌지 생각하게 만드는 문장이었습니다.
우울한 동료 교수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도 자신의 직업이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조지는 그들이 "중년, 장사치, 야바위꾼 같은 다수에서 스스로를 격리시키고도 얻은 것은, 인정 못 받고 메마르고 어려운 지식뿐"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조지의 두 가지 생각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대중의 무지이며, 다른 하나는 다수의 천박함입니다. 그는 교수이며 게이입니다. 무지한 대중들에게 지식인인 그는 소수자이며, 이성애자인 다수에게 그는 소수자인 것입니다. 교수와 게이라는 정체성은 모두 다수에게 격리된 소수자의 특징이 될 뿐입니다. 이것은 교수이며 게이이기를 선택한 조지의 잘못일까요?
이 세계에서 교양인으로 통하는 스트렁크 부인은 그를 동정하며 집에 초대하기도 합니다. 비록 그것이 소수자에 대한 다수자의 건방진 시혜의식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해도, 조지는 그런 동정마저 감사해야 했습니다. 짐이 없는 세상에서 모든 관계는 껍데기만 남았기 때문에. 스트렁크 부인에 비하면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조지의 정체성을 알고 나면 전염병자처럼 취급할 것이 뻔합니다. 아니, 자신의 선택이었다는 점에서 조지는 전염병자 취급에 더해 윤리적 비난까지 감수해야 합니다. 1960년대의 미국을 생각해 보면 스트렁크 부인의 태도는 굉장히 선진적인 것이었죠. 이 시절의 미국은 지금 우리의 소수자에 대한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영국인이라는 정체성도 미국인들 사이에서 그를 소수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유럽인들이 보기에 미국인들은 너무도 간결한 상징주의자들이고, 미국인들이 보기에 유럽인들은 천박한 물질주의자들입니다. 우리에게 그들은 같은 서구인일 뿐인데 말이죠.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대중과 지식인, 미국인과 영국인, 이렇게 이 소설 속에서 다수자와 소수자를 가르는 기준은 상대적이고 모호한 것입니다.
이 사회의 소수자로, 연인을 잃은 싱글맨으로 상실감에 침잠해 들어가던 그는 우연히 술집에서 제자인 케니와 함께 술을 마시게 됩니다. 그는 어떤 학생도 자신을 읽어내지 못하리라 생각했었죠. 그런데 자신을 읽고 있는 듯한 케니에게 묘하게 이끌립니다. 58세의 나이에 19세의 동성 제자에게. 케니의 환한 얼굴이 조지에게는 무지갯빛 광채가 되어 눈부시게 빛나고 나이아가라 폭포의 굉음으로 다가옵니다. 조지는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는 짐을 이제는 '과거'로 묻어두기로 합니다. 새로운 '짐'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죠. 왜냐하면 그는 현재를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조지는 빌어먹을 미래는 케니같은 젊은이들이나, 과거는 샬럿이나 가져야 할 것이고 현재의 자신은 새로운 짐을 찾아야 하고 사랑해야 하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인을 잃고 상심하던 중년의 지식인 게이는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연인은 죽었지만, 자신은 여전히 사랑하며 오늘을 살아야 하는 것이죠. 게이든 이성애자든 늙은이든 젊은이든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이 책은 퀴어 소설, 50대와 십대 소년의 애정행각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웹소설이나 장르 소설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고, 소재에 대한 호불호가 분명한 작품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소재와 에피소드를 통해 조지를 우리와 같이 버거운 세상을 살아가는 보편적인 한 인간으로 느끼게 만드는 힘이 이 소설을 좋은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는 지점이라 생각합니다. 과거 때문에 현재가 삐걱거리는 분들,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사느라 삶이 피로한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