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전권을 완역한 김원중 선생이 편역한 『사기 선집』입니다. 『사기』는 사관에 입각해 쓰여진 중국 최초의 역사서입니다. 더구나 국가에 의해 지어진 것이 아닌 개인의 노력으로 20년간 저술된 책이라는 점에서 경외감마저 들게 하는 책이죠. 동양의 역사서들은 주로 기전체와 편년체, 기사본말체 등으로 나누는데, 이 책은 기전체 역사서입니다. 편년체는 연대별로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으로 『춘추』나 『자치통감』, 『조선왕조실록』 등이 있습니다. 기전체는 사마천이 『사기』를 통해 확립한 정사 서술 방식으로서 본기(本紀)·열전(列傳)·지(志)·연표(年表) 등으로 구성됩니다. 이렇게 새로운 역사 서술 방식을 확립한 것만으로도 그 가치가 충분한 책이죠.
그런데 특이한 점은 우리가 『사기』를 읽을 때 황제의 전기를 중심으로 엮은 '본기'보다 일반인들의 이야기인 열전에 더 주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로 『사기 열전』을 읽게 되죠. 전권을 모두 읽기에는 벅차고 사마천의 역사의식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열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김원중 선생이 번역하고 엮은 이 책은 열전 외에도 본기와 세가까지 총 22편을 추려 모아 놓았습니다. 그래서 열전에서 만나기 어려웠던 월왕 구천 세가, 항우 본기, 고조(유방) 본기, 소 상국 세가, 유후 세가 등이 포함되어 있죠. 월왕 구천의 이야기는 오자서 열전과 교차되며 당시 역사를 더욱 입체적으로 조명할 수 있게 합니다. 항우 본기와 고조 본기, 소 상국 세가, 회음후 열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비록 선집이지만 열전과 본기, 세가를 함께 읽을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장점입니다. 또 각 장의 첫머리에 해당 인물에 대해 설명하고 사마천이 이를 어떤 의도로 서술하고 있는지, 어떤 부분에 주목해야 하는지 설명하여 복잡한 인물 관계를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 책을 읽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현재의 사회 정치 체제나 윤리 도덕관과는 상당한 거리가 느껴지는 이야기들이라 불편하고 비교육적이며, 비도덕적이라 생각되는 이야기가 부지기수임에도 왜 우리는 아직 이 책을 찾아 읽는 것일까요? 이번에 다시 읽으며 생각한 점은 단순히 '그 시대, 그러한 일들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이 책을 읽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벌어진 무수한 사건들과 그 시대를 살아온 무수한 인물들, 그것을 알기 위해 역사를 읽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가 역사를 읽는 이유는 그 사건과 인물들이 만들어낸 수많은 에피소드들 속에서 우리는 삶이란 무엇인지, 인간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오기 열전'의 주인공 오기는 위나라 사람으로 제나라와 전쟁 중인 노나라에서 장군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오기의 아내가 제나라 사람이라 의심을 받자 가차없이 아내를 죽여 노나라의 신뢰를 얻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훌륭한 장수가 되어 병사들을 지휘하죠. 그 시대 전쟁의 상황에 처해 있는 군인에게 가족의 안위는 하찮은 가치일 수도 있습니다. 대의(大義)를 위해 스스로 아내를 죽이고 크게 활약한 오기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어떤 것이 더 인간다운 선택이었으며, 이러한 선택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판단해야 하는 것일까요? 『사기』에는 너무도 많은 죽음들이 등장합니다. 대개 군령을 바로 세우기 위해, 왕이나 권력자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다가올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누군가를 죽입니다. 현재의 관점으로 보면 용납하기 어려운 사건들입니다. 그런데 이 속에서 우리는 개인이 막을 수도 넘어설 수도 없는 거대한 운명이 내 앞에 닥칠 수 있다는 것과 그러한 운명 앞에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시대와 상황을 넘어 어떤 조건 앞에 놓인 인간의 맨얼굴을 마주치게 되는 것이죠.
한편, 있는 그대로 교훈을 삼을 만한 내용도 꽤 많습니다. 특히 진나라 이세황제인 호해가 자신의 무지와 무능력을 감추기 위해 조고에게 국정을 모두 맡기고 궁중 깊숙한 곳에서 팔짱을 끼고 있다가 조고의 권세가 결국 황제의 권세를 누르고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는 내용은 마치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상황을 보고 있는 것 같아 씁쓸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정치인들이 이 책을 꼭 읽어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배워야 하고, 역사를 배우기보다 '역사에서 배워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