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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 과학쌤 May 10. 2020

우리가 함께 진동한다면

취미로 뮤지컬 해요 feat. 진동수와 공명

"취미가 뭐예요?"

새로운 사람을 소개받는 자리에서 흔하게 주고받는 질문이다. 보통은 취미가 여행이라고 답하는데, 가끔은 대답이 달라질 때가 있다.

"취미가 뭐예요? 퇴근 후에 주로 뭐하세요?"

여행은 주말이나 휴가철에 가능한 것이기에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어딘가 어색하다.

"취미로 뮤지컬 해요."

내 새로운 대답에 보통은 특이하다는 반응이 돌아온다.


꽤 오랫동안 여가 시간에 뮤지컬을 해왔다. 프로 배우들의 뮤지컬을 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들을 따라서 노래를 불러보고 연기를 해보는 것 또한 내가 사랑하는 취미이다. 조금 특별할 수도 있지만, 어떤 면으로는 누구나 경험해본 활동일 수 있다. 어린 시절 한 번쯤은 소꿉장난을 하며 역할놀이를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역할에 몰입을 잘하는 편이었고, 잡다한 소품을 사용하거나 목소리를 바꾸어가며 실감 나게 노는 것을 좋아했다.


배우나 성우가 되는 대신 직장인 연극 동호회를 찾다. 어떤 역할이라도 좋으니 연기를 할 수 있다는 마음에 설레었지만, 인원이 모집되지 않아 시작이 미루어졌다. 기다리던 어느 날 동호회에서 연락이 왔다. 연극반보다 인원 모집이 잘 되는 뮤지컬반에 들어오는 것은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노래에 자신이 있는 것도, 춤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 선뜻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검색창에 '뮤지컬'을 입력면서 다시 고민이 시작되었다. 결론적으로 한 뮤지컬 연구회를 선택해 가입한 이유는 회비가 저렴한 편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부분 때문이었다.


팀원이 모집되면 배역을 정하는 오디션을 보고, 몇 달 동안 장면들을 연습해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 나는 주어진 대본을 훑어보고 가장 비중이 작아 보이는 역할에 지원했다. 총 10장까지의 대본 중에 8장부터 대사가 시작되는 여학생 역할이었다.

처음 모여 대본을 읽어보던 날, 연출 선생님께서 등장인물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아빠와의 추억 중에 가장 좋았던 게 뭐예요?"

당황한 나는 대본을 잘못 받았나 싶어 종이를 뒤적였다.

대본에 나오지 않는 인물의 삶은 물론이고, 내가 분석한 인물의 성격을 바탕으로 걸음걸이와 같은 사소한 습관까지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 가르침이었다. 대본에 나와 있는 것만 따르는 연기는 누가 봐도 연기일 뿐이다. 연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극 중 인물이 되기 위해서 배역 분석이 시작되었다.


가르침을 받자마자 완벽히 적용할 정도로 재능이 있지는 않았고, 노래와 춤도 익혀야 했기 때문에, 극 중 인물에 녹아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네 달 가량의 연습 기간 중 마지막 한 달 동안은 일주일 중 5일을 연습실에 갔다. 편도로 1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였는데, 연습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피곤함에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짜릿하고 행복해서 웃음이 났다.

지인들을 초대해서 공연하던 날 무대 위에서 '나'를 버리고 극 중 인물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극 중 아빠와 부둥켜안고 울던 순간 많은 관객들이 함께 훌쩍였다는 것이다.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그때 이후로 나와 상대 배역, 그리고 관객 모두가 한 마음이 되는 경험은 다시 하지 못 했지만, 첫 공연에서 느꼈던 전율 때문에 몇 년 동안 이 취미 생활을 계속해오고 있다.

다른 배역들과 교감하고 연기와 합창의 합을 맞춰가는 과정, 어색할 수 있는 춤선을 고쳐가는 과정, 듣기 좋은 소리로 노래하기 위해 발성을 개선하는 과정들에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에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취미이다. 주인공을 맡았던 때에는 내 불안정한 노래 때문에 작품을 망치는 것 같아서, 연습이 끝난 후에 차 안에서 혼자 울면서 새벽까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가 아닌 누군가를 이해하고 그 삶을 따라가며, 노래와 춤을 포함한 다양한 방식으로 보는 이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은 분명 짜릿하고 가슴이 벅찬 일이다.


나의 노래와 대사가 관객에게 닿기 위한 시작은 성대의 진동이다. 폐에서 나가는 공기가 성대를 진동시키면서 목소리가 나온다. 물체는 모양이나 밀도 같은 특성에 따라서 단위 시간 동안 일정한 횟수로 진동하는데 이것을 고유진동수라고 한다. 성대 역시 고유진동수를 가지고 있는데, 주변 근육의 도움으로 성대를 움직이면서 진동수를 변화시켜 다양한 높낮이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성대를 지난 공기의 진동은 혀의 위치나 입 모양에 따라 또 다른 힘을 받아 증폭될 수 있다. 그네의 진동에 맞춰 밀어주면 흔들림이 커지듯이, 물체의 고유진동수와 같은 진동수의 힘이 주어지면 진동이 증폭되는데, 이 현상이 공명이다. 또렷하고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공명이 일어날 수 있는 얼굴의 움직임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공연에서 소리의 공명만큼 중요한 것은 영혼의 공명일 것이다. 무대 위의 배우가 표현하는 감정과 에너지가 다른 배우나 관객에게 전달되어, 우리 모두가 느끼는 감정의 진동수가 같아지는 순간, 나의 첫 공연에서 전율하던 순간, 우리는 공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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