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엄마의 깻잎전
세상의 모든 가족에게, 어떤 모습이든 괜찮다고
세상 모든 엄마들이 요리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엄마는 김이라도 꺼내서 한 숟가락 더 먹이려는 보통의 엄마였지만, 엄마표 반찬은 주로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것들로 가짓수가 많지 않았고, 나는 입이 짧고 까탈스러운 딸이었다. 학창 시절 주로 먹던 음식은 학교 앞 떡볶이와 과일 정도였다.
명절이 되면 외할머니댁에 가는 것이 좋았다. 외숙모가 만든 음식은 나물조차 맛있었다. 친척들이 모두 모이면 아주 큰 상을 두 개 펼치고 그릇을 가득 올렸다. 말간 탕국과 고구마튀김, 동그랑땡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나는 동그랑땡이 더 많이 담긴 그릇 앞에 앉으려고 욕심을 부리곤 했다.
언제였던가. 외숙모가 새로운 전을 부쳤다. 고구마튀김이나 동그랑땡처럼 노란색이 아니라 초록색이 보이는 전이었다. 반달 모양의 푸른 전을 입에 넣으면 건강한 어른의 맛이 날 것만 같았다. 투둑-. 한 입 베어 물자, 이빨 모양을 따라 예쁘게 잘리는 대신, 푸른 채소가 질긴 결을 따라 찢어지다가 끊어졌다. 입 안에서 우물거리다 보면, 계란옷을 살짝 얹은 까슬한 잎의 감촉 아래에 내가 사랑하는 동그랑땡 맛이 있었다. 외숙모는 이 낯설면서 익숙한 전을 깻잎전이라고 했다. 조금은 까슬하고 조금은 질긴 잎을 끊어내면, 은은한 향긋함 속에 짭조름하고 고소하면서 부드러운 고기 소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퍽 마음에 들었다.
명절 연휴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도 엄마를 졸랐다.
"엄마, 나 깻잎전이 먹고 싶어."
엄마는 아무런 속재료 없이 깻잎에만 튀김옷을 입혀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깻잎튀김을 해주셨다. 내가 기대한 깻잎전과는 모양도 맛도 달랐다. 실망한 내 모습에도 엄마는 단호했다.
"그 깻잎전은 손이 많이 가서 엄마는 못해. 다음에 해 줄게."
엄마가 말한 다음은 꽤나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찾아왔다. 처음 깻잎전을 먹어봤던 그 나이의 두 배쯤이 되었고, 부모님과 떨어져서 1인 가구를 이루고 있을 때였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요리를 잘하는 것이 아니듯, 세상의 모든 가족이 정서적으로 친밀한 것은 아니다. 아픈 오빠와 그런 오빠가 늘 아픈 손가락이던 부모님 옆에서, 어린 나는 혼자 철이 들었다. 내가 아픈 것은 말할 수 없었고, 가족 중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했다.
가족보다는 친구가 편했고, 부모님과 함께 있는 시간보다 혼자 있는 시간에 훨씬 마음이 편했다. 독립한 후에는 부모님이 계시는 집에 1년에 한두 번 갈까 말까 하면서 연락 한번 먼저 하지 않는 딸이 되었다. 혼자 있는 집에서 마음껏 웃고, 소리 내어 울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어느 추석, 바쁘다는 핑계로 얼굴을 비추지 않던 딸의 원룸에 엄마가 찾아왔다.
"먹고 싶은 것 없어?"
엄마는 다 큰 딸의 식사 걱정부터 했다. 그 순간 아무거나 먹자는 말 대신 어쩐지 깻잎전이 튀어나왔다.
이번에 엄마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장을 보러 나섰다. 한가득 고르려는 엄마를 말리면서 깻잎, 두부, 다진 고기, 계란, 그리고 소포장된 양파와 당근을 샀다. 혼자 살던 원룸에는 조리 도구도 마땅하지 않았다. 두부는 물기를 꽉 짜야했는데, 면보자기가 없어서 키친타월로 엉성하게 물기를 짜고, 들러붙은 휴지를 떼어냈다. 칼이라고는 무딘 날의 과도 하나뿐이라 당근을 썰다가 손목이 아파서, 과일을 갈아 마시는 블렌더에 몽땅 넣고 갈아 버렸다. 재료를 섞을 믹싱볼도 없어서 시리얼 그릇을 여러 개 꺼냈다. 작은 싱크대는 이미 난리통이었다.
엄마는 그래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블렌더에 갈아버린 야채와 물기가 덜 짜인 두부 때문에 깻잎전은 질퍽했지만, 이상하게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추억의 맛이 씹혔다. 엄마의 사랑 맛이라는 진부한 이야기지만 어쩔 수 없다. 깻잎전의 맛이 달라도, 가족마다 숨겨진 사연이 달라도, 서로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도, 엄마의 딸이니까.
여전히 가족에게 나의 이야기들을 털어놓지는 못한다. 함께 있는 시간이 어색할 때도 있고 불편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엄마 아빠도 엄마 아빠가 처음이었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고 싶었다는 것을. 때때로 엄마가 다 큰 딸에게 이제야 물어오면 피식 웃음이 난다.
"딸! 깻잎전 해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