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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 과학쌤 Jun 19. 2022

마음의 녹는점은 몇 도일까

feat. 물질의 상태 변화

 프라하 이후에 여행했던 도시들에서의 추억이 강렬한 것에 반해 프라하에 대한 기억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동유럽 여행의 첫 번째 도시로 프라하를 계획한 것은 여행 초반에 몰골이 멀쩡할 때 사진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프라하에서 스냅사진을 찍은 신혼부부들의 모습이 그렇게 예뻐 보였는데, 정작 나는 언제쯤 신혼여행을 떠나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결혼할 때쯤이면 젊음의 반짝거림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기어이 프라하의 사진작가님께 연락을 드렸다.


 민망해하는 피사체와 달리 작가님은 프로였다. 카메라 앞에서 어색하게 뚝딱거릴 때마다 자연스럽게 머리를 쓸어내리는 척하거나 시계를 보는 척하는 구도를 만들어주셨다. 이 날 전수받은 촬영 꿀팁들 덕분에 완성된 결과물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반짝거렸다. 그렇지만 슬프게도 작가님이 찍어준 사진을 보고 나면 예쁜 풍경에 대한 감흥이 덜해졌다. 혼자였으면 분명 긴 시간 머물렀을 곳일 텐데, 작가님의 눈을 통해 카메라에 담고 나자 어쩐지 시들해져서 다시 찾고 싶지 않게 되어 버렸다.


 작가님과 촬영하면서 주요 명소들을 소개받은 뒤에 여행을 하면 좋겠다는 계획과 달리, 다음 날부터는 무엇이 있는지도 모를 외곽 지역만 돌아다녔다. 전차를 타고 어딘가에 내렸다가 비를 맞으며 골목을 걷고 이름도 모르는 공원의 언덕을 올랐다. 종일 프라하의 변두리에서 의미없이 걷다가 지친 다리를 끌고 시내로 돌아오는 길에 뜨레들로를 샀다. 아이스크림을 감싼 겉바속촉의 굴뚝빵 뜨레들로. 명성과 달리 빵은 마냥 딱딱했고 아이스크림은 향도 없이 달았다. 아이스크림이 녹아 흐르는 빵을 손에 쥔 이방인 앞에 빨간 전차가 멈췄다. 뜨레들로를 몽땅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달려가 전차에 올랐다. 창 밖의 이름 모를 풍경으로 둘러싸인 전차 안의 공기는 아이스크림보다 달았다.





 아이스크림이 녹는 것은 따뜻한 온도에서 상태가 변화하는 것이다. 어떤 물질의 상태는 물질을 이루는 분자들의 배열과 움직임에 따라 결정된다. 온도가 낮을 때는 물질을 이루는 분자들이 느리게 움직이면서 서로 가깝게 끌어당겨 규칙적인 배열을 갖춘 고체 상태로 존재한다. 온도가 높아지거나 압력이 낮아지면 분자들의 움직임이 점점 활발해져 분자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데, 분자들의 배열이 흐트러지면서 불규칙한 모양을 가지게 된 것이 액체 상태다. 분자 사이의 거리가 이보다 더 멀어져 분자들끼리 서로 영향을 미치기 어려워진 상태가 기체인데, 일정한 부피를 가지는 액체와 달리 기체의 부피는 가변적이다.


 물질의 상태가 변화할 때 모양이나 부피와 같은 물리적인 특성은 바뀌지만 분자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화학적 특성은 변함이 없다. 무색무취의 얼음이 녹은 물도 여전히 무색무취이며, 달콤한 설탕을 가열해 액체 상태로 녹여도 여전히 달콤한 것처럼 말이다. 다만 설탕을 녹일 때 공기를 차단하지 않으면 화학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달고나를 만들 때 설탕이 갈변하는 것처럼 설탕 분자를 이루고 있는 탄소와 수소 원자의 결합이 깨지고 공기 중의 산소와 반응하면 새로운 분자들이 만들어지는데 처음의 설탕 분자와는 성질이 달라진다. 물리적으로 상태가 변하는 물질들만이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단단했을 때의 기억을 간직한 채 아이스크림이 사락 녹는다. 처음 받았을 때의 찐득한 달달함을 그대로 품은 아이스크림이 흘러내리던 어떤 순간을 기억한다. 프라하 외곽을 지나는 빨간 전차 안의 공기가 녹아 흐르며 일렁이던 순간을 기억한다. 짧지만 선명하게 느껴지는 순간, 이유 없이 분명하게 다가오는 순간들이 있다. 어떤 순간 마음의 녹는점은 각자에게 다른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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